여행의 목적을 되새기다.
이번 여행을 기획하면서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의 오래전 수도이고 현재는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인 크라쿠프에서 약 50km 떨어진 작은 공업도시다.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독일어 : 아우슈비츠)이다. 이곳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나치 독일이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을 잡아와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시켰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강제노동과 학대,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최소 1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송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러시아군에 의해 해방될 때 생존해 있던 사람은 고작 7천5백 명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는 나와 다르다는 차이를 차별로 인식할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나치 독일은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입각해 그들과 민족이 다른 유대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과 사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정치인, 사상가, 종교인들 또한 차별하고 학살했다. 그래서 이곳에 오고 싶었다. 차이를 축복으로 생각하고 다름을 존중하자는 나의 freebow운동과 정반대에 있는 아우슈비츠를 텍스트나 이미지가 아닌 내 눈으로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라트비아 리가를 출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그리고 크라쿠프 구시가지에 숙소를 잡고 다음날 아우슈비츠로 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거창할 건 없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고 크라쿠프 올드타운에서 freebow를 하며 정신무장을 하는 것이었다. 폴란드 사람들은 침략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것처럼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한 아픔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존중의 의미와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얘기를 해 왔다. 특이하게도 폴란드 사람들은 절을 하는 것에도 적극적이었지만 내가 들고 있는 피켓을 찍으며 그 의미를 간직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모습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들 마음속의 상처와 아픔이 크다는 반증인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그들이 가진 역사,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지척에 둔 그들에게 존중과 평화에 대한 마음은 남달라 보였다.
크라쿠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우슈비츠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편안한 잠자리였지만 소풍을 앞둔 소년처럼 잠을 설쳤다. 긴장을 한 걸까. 배낭가방이 없는데도 어깨가 무거웠다. 버스 안에 탄 사람들도 다 나와 같았는지 버스 안은 조용했다. 침묵 속에 버스는 1시간을 달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음침하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오래된 건축물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주변을 둘러싼 철조망과 해골 모양의 이정표가 이곳이 단순히 버려진 건물이 아닌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정문을 통과해 걸어가면 수용소 입구에는 독일어로 “일하면 자유롭게 된다”라는 문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반 세기가 지난 현재의 우리는 안다. 그 자유로움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수용소에서 박물관으로 변모한 이곳을 방문하는 우리는 다시금 이 문을 나올 수 있지만 반 세기 전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없었으리라.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이곳으로 끌려왔을 그들, 다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저 기만적인 문구를 보며 열심히 일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시작부터 눈앞이 흐려져 왔다.
아우슈비츠는 넓었다. 이 넓은 공간도 부족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나치 독일에게 과연 사람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피가 흐르는 사람, 세상 속에 서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같은 존재라고 인식했다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 이곳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수용소 곳곳을 걸으면서 분노했다. 그리고 종내에는 인간에 대해 실망했다. 지하에 건설된 가스실과 부서진 시체 소각장을 보면서 좌절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 소각의 굴뚝에서는 아직도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꿈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들의 삶에 대한 갈망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것만 같아 나는 굴뚝과 눈치 마주칠 때마다 목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두려움과 아픔이 없는 곳에서 지금은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현재의 아우슈비츠는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것들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다른 박물관들처럼 유물이나 기념품이 아니라 이곳에서 희생된 분들의 생필품이라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산처럼 쌓인 희생자들이 신었던 신발, 그들의 안경, 컵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린아이의 물건을 발견했을 때 애써 참았던 눈물과 신음이 앙다문 입술과 눈꺼풀을 비집고 터져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죽일 수 있었을까? 아무리 다르다는 사실이 밉다고 해도 그래도 아이는 살려줄 수 있지 않냐는 말이 한국말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내 비명과도 같은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도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버렸다.
이곳에 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이곳에서 freebow를 할 계획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마주하고 나서 그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아무리 내 뜻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감히 나 따위가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지금 살아 숨 쉬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린 희생자들 앞에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듯 ‘우리 서로 존중하며 더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가자’는 미래지향적인 행위를 하는 건 참으로 건방지고 무지한 행위일 테니까 말이다. 또 사실 2시간가량의 투어를 마치고 정신적으로 탈진한 내게 엎드려 절을 할 만큼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엎드린 후 다시 허리를 펴기까지는 꽤나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리라. 나치 독일과 같은 인간으로서 다시금 이 하늘 아래 당당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기까지는.
Freebow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아우슈비츠에서의 느낀 서로의 소감과 인류에 필요한 가치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놀랍게도 나와 얘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인이었다! 그들은 불과 5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발생한 무자비한 학살에 대해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일으킨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학습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교실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려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한 독일인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며 되풀이되면 절대 안 되는 슬픈 역사를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아이의 슬픈, 그러나 배움으로 빛나는 파란 눈동자 속에는 다름에 대한 이해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깃들어 있었다.
독일에서 온 한 남자 대학생과는 꽤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에서 온 내가 이곳 아우슈비츠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했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서 강제징용과 강제수용, 그리고 학살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당신이 아우슈비츠에서 느끼는 감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일본은 35년 간 대한민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약탈과 강제징용,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제 고향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듣고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이곳에서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며 분노할 일입니다만, 저는 여기에 한국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는 감정은 당신과 그리고 이곳을 찾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지 않을 것 같아요.”
“다르지 않다면 어떤 건가요? 슬픔인가요?”
“네, 그리고 아픔과 반성, 또 다짐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슬픈 일은 당신이 한 일이 아닙니다. 무엇을 반성하는 건가요?”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가는 같은 인간으로서 반성합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지했던 저를 반성하고 이곳에서 벌어진 차별을 알게 모르게 행하고 있었던 저를 반성합니다. 일본인이란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중국인이란 이유만으로 기피했던 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겠다고. 나부터 인류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낼 거라고.”
“솔직히 저는 제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전 반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제대로 깨달은 게 맞군요.”
그 후로 우리는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존중의 가치를 퍼뜨리기 위해 여행하는 내 여행길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당신의 freebow가 2012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Freebow는 존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니까,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존중의 가치를 세상에 남기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곳, 아우슈비츠를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진심이 담긴 그의 충고에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도 그 나름의 방법으로 평생 이곳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리라. 그와 같은 이들이 있는 한, 아우슈비츠는 영원히 박물관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이 하늘 아래 허리를 숙이고 네 발로 땅을 걸어 다니는데, 오직 인간만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허리를 펴고 하늘을 대적한다. 그러다 큰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또 때로는 허리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반성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하늘 무서운 줄을 알고 자신이 믿는 사실 밑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freebow를 통해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와 같은 시간을 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땅에 떨어져 있던 존중의 가치를 줍게 된다면 참으로 좋겠다. 물론 그들이 줍는 것이 존중이 아닌 다른 것이라도 좋다. 그것이 평화든, 도덕이든, 존중이든, 양심이든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 아래 그 밑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살면서 주머니에서 흘린 것을 다시금 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으로 나는 다시금 절을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바라보게 한다. 다시 freebow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