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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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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12. 2023

06. 라트비아 리가, 날 반하게 한 도시

사랑스러운 리가에 푹 빠지다.

이제 어디로 갈까? 베를린 유로버스 터미널에서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말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런던에서 베를린까지 왔는데 그다음이 딱 하고 떠오르지 않았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으니까. 어디든 가면 될 텐데, 쉬이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말고 다른 걸 시키려고 했을 때 느끼는 막막함이랄까. 에라 모르겠다. 무작정 티켓창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 티켓 하나 주세요.” 


언젠가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고 꼭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베를린에서 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인생이, 그래서 여행이 재밌는 것이겠지. 종업원은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내가 쓴 갓을 보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 행선지를 추천해 주었다. 바로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버스였다. 뭐 안 될 게 있나?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데.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티켓을 고이 받았다. 그리고 급하게 터미널 와이파이를 잡고 라트비아, 리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야, 대체? 


이름도 생소한 라트비아라는 나라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 3국 중에 하나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었다가 1991년 소련의 해체에 따라 독립했다. 그리고 리가는 그런 라트비아의 수도였다. 사실 버스표를 받기 전까지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부랴부랴 검색한 짧은 조사로는 그 나라를 알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하긴 내가 잘 알고 모르는 게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모국이 아닌 타국을 지식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남이 말해주는 텍스트가 아니라 내 오감으로 그 나라를 느끼기 위해 나는 기꺼이 라트비아, 리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베를린을 출발해 리투아니아를 거쳐 장장 18시간 만에 리가에 도착했다. 이렇게 장시간을 운행하여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버스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그 긴 시간을 버스에서 먹고 자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에도 놀랐다. 무엇보다 이런 대장정을 나이 든 할머니께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영국인 할머니와 자다 깨며 중간중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께서 한 여러 말 중에서 내게 큰 울림을 줬던 말이 있다. 


“젊을 때는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시간이 없어진다. 더 나이가 들면 열정이 사라진다. 그 열정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계속해서 불씨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던 여행을 계속해서 사랑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중간중간 여행을 하며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할머님과 리가에서 freebow를 끝으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리가에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버스에 타고 있을 때는 제발 빨리 좀 내리고 싶었다. 어서 리가에 도착해서 또 멋지게, 하고 싶은 freebow를 실컷 해야지 했는데, 막상 버스에 내리고 나니 게스트하우스부터 가고 싶었다. 간사한 내 마음도 마음이지만 고장 난 몸이 더 문제였다. 군대로 돌아간 듯한 훈련과도 같은 일정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베를린에서 하루 종일 비를 맞고 그대로 버스를 타서 쪽잠을 자며 강행군을 한 까닭이었다. 누군가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몸살에 한 여름 순풍이 겨울철 시베리아 칼바람처럼 내 몸을 할퀴는 듯했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러다 내 이름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객사할 수 있겠구나’하는 불안이 일었다. 물론 생의 그 어느 순간에 불현듯 다가오는 귀천이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나 아직은 아니었다. 난 아직 가야 할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스물여섯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아직 해야 할 970번의 freebow가 남아 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 또는 생의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며 몸을 누일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안타깝게도 다른 도시에서는 그렇게 잘 보이던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입에서 단 내가 나는 듯했다. 식은땀이 망울 져 떨어지고 다시 맺히기를 몇 차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무작정 게스트하우스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들 동양인이자 한복을 입은 나를 특이하게 바라볼 뿐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동양인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유럽 길거리에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동양인이 이곳 라트비아, 리가에서는 나 혼자 뿐인 듯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뚝 떨어진 동양인에게 쉴 공간은 요원해 보였다. 


다행히 길거리에서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들에게 게스트하우스를 물어보던 내게 한 동양인 여성이 다가왔다. 그 여성은 말레이시아 의과대학에서 공부 중인 의대생이었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복을 알고 있다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혹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숙소를 찾고 있다고 하였고 그녀는 잘 됐다며 내게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위치도 가깝고 비용도 저렴하며 시설이 깔끔하다며 강력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게스트하우스까지 길안내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오늘이 리가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자기가 그러했듯 나도 리가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내가 리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내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 친절을 베풀어 준 당신 덕분일 거라는 내 얘기에 잇몸을 드러내며 웃은 그녀. 그녀를 배웅하고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섰다. 


게스트하우스는 그녀 말대로 아주 깔끔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1박에 3만 원 수준으로 그간 지나온 게스트하우스 가격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에 연신 감사인사를 하고 짐을 풀었다. 내가 머무는 방 안에 침대는 8개나 있었지만 입실자는 나 혼자였다. 주인아주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손님이 없어 너무 다행이었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깊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은 저물어 사방이 어두웠다. 아직까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침대는 내가 흘린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싹 다 나을 줄 알았는데, 웬걸. 여전히 머리는 무겁고 몸에서는 남은 수분을 모조리 뱉어 내기라도 할 기세로 땀을 뿜어내고 있었다. 짧은 생각에 비상약도 준비해 오지 않았는데, 이를 어쩌나. 일단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싶어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게스트하우스를 나가려는 나를 발견한 주인아주머니께서 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세요? 몸은 괜찮아요?”

“네? 아! 저녁을 먹으려고요. 몸은 괜찮아요.”

“아니, 아까 방 밖까지 소리가 들려서 걱정 돼서 잠깐 들어갔었어요. 미안해요” 자면서 나도 모르게 잠꼬대를 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감기가 걸린 것 같아요. 조심하겠습니다.”

혹시나 쫓겨날까 싶어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발 이 불쌍한 중생을 내쫓지 말아 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빛을 쏘았다.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약은 먹었어요?” 


내가 아직 못 먹었다고 하자 그녀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수프와 약이 들려 있었다. 따뜻할 때 먹고 감기약을 먹은 후에 푹 쉬라는 그녀의 말에 가슴 한 구석이 울려왔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게스트하우스 내 식당에 가서 수프를 한 술 떴다. 맛있었다. 아니, 사실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에 수프가 연해졌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있구나! 처음 본 내가 뭐가 이쁘다고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걸까? 나는 손님이 없어서, 장사가 안 돼서 다행이라고 이기적인 생각까지 했는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인아주머니의 친절에 고마워서, 나는 이 날도 울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 덕분인지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몸이 개운했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자 싶어 오늘 하루는 freebow를 쉬기로 했다. 그래서 늘 입던 두루마기 도포 대신 편한 티셔츠를 입고 방을 나섰다. 오늘도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주인아주머니께 덕분에 감기가 씻은 듯이 나았다고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하루 더 숙박을 연장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리가 관광명소를 안내받았다. 늘 손에 들고 있던 freebow 피켓이 아닌 관광지도를 들고, 갓 대신 모자를 쓰고 관광객 노성종으로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freebow 휴일입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추천해 주신 경로를 따라 리가 시내를 관광했다. 리가의 올드타운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서 깊고 또 중세적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올드타운 내 삼 형제 건물은 각기 다른 시대에 건축되어 건축양식의 변화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올드타운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구경하고 웃었다. 저녁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조명으로 하늘을 덮은 듯한 리가 중심가의 한 pub에서 맥주도 한 잔 했다. 낮의 리가가 고즈넉한 매력이 있었다면 밤의 리가는 화려하고 춤과 음악이 있는 자유로운 매력이 있었다. 어딜 가든 음악이 길거리에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미소가 있었다. 그래서 난 리가에 푹 빠졌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그녀의 말이 맞았다. 리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길거리 음악을 들으며 관광과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사랑스러운 리가에서 행복한 관광을 했기에 그리고 처음으로 freebow를 쉬었기에 어찌 보면 이런 생각이 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글쎄, 내가 관광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기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나의 정의로는 관광이 오감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여행은 육감을 만드는 것이다. 관광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이라면 여행은 거기에서 나아가 자신만의 특별한 목적을 더한다. 그것이 나와 같은 freebow라던지 또는 자신만의 내적 깨달음이라던지, 삶의 방향이라던지 말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관광을 하고 무언가를 깨닫거나 해서 달라질 수 있지만 난 그걸 관광이 아닌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상태라면 이미 관광이라는 사전적 의미인 보고 즐기는 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니까 말이다. 관광과 여행에 대해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제까지 아팠던 사람이 늦게까지 돌아다닌다며 주인아주머니께 혼이 났다. 그래서 여기서 하루 더 머물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머물고 싶게 만드는 리가, 사랑스러운 라트비아 리가의 둘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오늘은 다시 내 기준의 관광이 아닌 여행을 시작했다. 이틀이나 쉬었으니 다시금 freebow를 할 때다. 차별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freebow의 정신을 리가에게도 선물하고 싶다. 물론 리가에는 이미 존중의 마음이 도시 곳곳에, 사람들 마음에 새겨져 있지만 말이다. 다시금 한복과 갓을 입은 날 보고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멋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담해 절을 했다. 그리고 리가의 터미널로 향했다. 그녀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리가의 터미널에서 프리바우 피켓을 들고 맞절을 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과 freebow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freebow를 하는 도중 중간중간에 배낭가방을 메거나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숙소를 찾고 계시나요?”


이것이 주인아주머니께 드릴 나의 선물이었다. 사람들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하는 내게 관심을 보였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사진을 보여주고 친절한 아주머니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에 간다면 그 누구에게도 리가에서의 추억을 자랑할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이 리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를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게스트하우스를 소개하였는데 과연 몇 명이나 그곳을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 홀로 머물렀던 그 방이 오늘 하루만은 꽉 차기를 바랐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께서 찾아온 손님들로부터 내 얘기를 들으며 예의 그 미소를 짓고 계시기를 바랐다. 


나는 여전히 리가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직도 리가를 꿈꾼다. 사랑스러운 리가, 보고 싶은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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