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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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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06. 2023

05. 독일 베를린, 비 오는 베를린 그리고 엄마

베를린 장벽에서 날 버린 엄마를 회상하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 네덜란드를 떠나 독일의 베를린으로 향하는 내내 이 말을 곱씹었다. 네덜란드야 언젠가 연이 닿으면 다시금 만날 수 있겠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그녀와 내 이 두 눈 감는 그날까지 다시금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지금껏 여행 중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어려운 일일 터였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여름밤의 꿈. 딱 지금 헤어짐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 감정이란 것이 머리로 쉬이 되는 것이 아닌지라 베를린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가슴을 내리눌렀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나의 마음을 달래려 하는지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 이미 지나온 것에 후회를 남기지 말자.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 내가 해야 할 것에 집중하자.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귀중한 가르침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 않고 돌아선 이유, 내가 이 여행을 하고 내가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바로 FREEBOW!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존중의 가치를 퍼뜨리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베를린에서 숨 쉬고 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일말의 내적갈등을 비 속에 흘려보냈다. 


베를린 정류장을 걸어 나와 FREEBOW 장소로 물색해 놨던 브란덴부르크문으로 향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791년에 세워진 독일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에 하나로 베를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는 필수코스다. 무엇보다 이 문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서독과 동독의 지도자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면서 평화의 문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평화의 의미를 품은 곳. 베를린에서 FREEBOW를 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그러나 날씨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환영인사 차 아픈 마음을 달래려 내리던 부슬비가 점차 굵어지더니

걷는 와중에 온몸을 흠뻑 적시는 소나기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래서야 FREEBOW를 하기는 글렀다. 행여 브란덴부르크문으로 우산 쓰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장대비 속에서 나와 바닥에 주저앉아 절을 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퍼붓는 비라도 잠깐 피해보려 했지만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이라도 찾으려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얇은 두루마기 도포는 비에 흠뻑 젖어 초라한 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뛰는 와중에 뒤로 돌아간 갓은 목 울대에 걸려 덜렁거렸다. 비 맞은 생쥐꼴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 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뭔 꼴이란 말인가. 그 순간 내 얼굴에서 흐르는 것이 비단 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비인지 눈물인지 눈을 가리는 물방울을 훔치며 정신없이 달리던 나는, 미끄러운 빗길에 고무신이 미끄러지며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보는 사람도 없기에 쓰러진 채로 그대로 잠깐 누워 있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더 이상 젖을 것도 없었다. ‘참 인생 재밌다.’ 이쯤 되니 헛웃음이 터졌다. 누운 채로 시원하게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다시금 일어날 힘을 얻어 몸을 일으켜 세울 때 그때까지는 달리고 넘어지느라 보지 못했던 옆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독일의 베를린 장벽,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였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는 동서독 통일 후 베를린 장벽에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희망과 화합의 그림을 그려 놓으면서 대표적인 평화의 상징이 된 곳으로써 베를린의 필수방문지다. 그런 곳을 바보 같이 앞만 보고 달려가다 지나칠 뻔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래도 그래서 인생이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는가! 이스트사이드갤러리와의, 베를린장벽과의 영화 같은 만남을 맺게 해 준 이 비와 나의 고무신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빗 속의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에는 100여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바로 “형제의 키스”라는 작품이다. 소련 서기장 브레주네프와 동독 서기장 호네커, 두 사회주의자의 키스를 그린 것으로 언뜻 보면 희화한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1990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베를린장벽이라는 장소적 특이성을 고려해 보면 왜 이 그림이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잡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 역시도 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이 그림 앞에 우뚝 서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베를린장벽을 마주하게 되면 남북한 통일을 떠올린다고 한다.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남북한이 동서독이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한 것처럼 통일되기를 바라며,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이념과 정치를 떠나 하나 된 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 역시도 군생활을 강원도 철책선, GOP에서 근무했기에 그 느낌이 남달랐다. 우리의 주적이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2~3번씩 철책선을 오르내리며 밤새도록 칠흑 같은 철책 너머 북한땅 허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서 통일이 돼서 이 지옥 같은 철책선 근무가 끝나기를 바라며 독일의 베를린장벽을 연상하고 했던 21살의 군복 입은 노성종은 이제 26이 되어 한복을 입고 베를린장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남북한이 통일이 되기를 바라며, 지금도 철책선 위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고 있을 후배 군인들을 생각하며 베를린장벽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베를린 장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났다. 산에서 나고 자라 도시로 나온 아버지와 바다에서 나고 자라 도시로 나온 어머니는 살아온 환경 자체가 달랐다.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배고픔에 나무껍질을 벗겨 먹곤 했던 아버지와 경북의 해안가에서 바다를 벗 삼아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던 어머니가 잘 맞다면 그거야말로 운명일 테지만 자식으로 그래도 꽤 긴 세월을 본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헤어짐, 이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두 분이 이혼하게 되었을 때 들었던 감정은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였다.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이성덩어리 아버지의 굵디굵은 눈물이었고 늘 부부싸움 후에 부엌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냉정한 뒷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어머니가 우리를 속이고 모든 돈을 탕진한 것은 날 경악하게 했다. 예금은 물론이거니와 보험, 하물며 누나와 나를 대학에 갈 때 쓰려고 모은 적금마저 해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사람이 정말 그동안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딱 거기까지면 좋았을 걸. 왜 또 카드 돌려 막기를 해서, 왜 주변에 빚을 졌을까. 한평생 가정 밖에 몰랐던 나의 어머니는 그 큰돈을 어디에 썼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그러했구나.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최소한 그동안의 정이 있으면 그저 헤어지면 될 것을 왜 상대방이 일평생 일궈온 것을 망쳐버린 것인지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혼을 요구하는 어머니를 붙잡으며 어머니 빚을 갚으려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도 도저히 내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칩거하고 아버지는 은행이며 형제들이며 이리저리 돈을 구하러 다니는 날들이 며칠간 이어졌다. 집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아침이 되었다. 


거실로 나온 내 눈에 띈 것은 TV위에 올려진, 봉투에도 담기지 않은 편지 한 장이었다. 그 편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쓴 것이었다. 삐뚤삐뚤한 글씨에 군데군데 틀린 맞춤법이지만 그 안에 담긴 구구절절한 감정은 한창 사춘기 반항으로 똘똘 싸맨 나도 눈물짓게 했다. 거실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어머니는 오랜 시간 잠겨 있던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서 나와 마주했다. 그리고 별다른 말도 없이 꾸깃꾸깃하게 접힌 이만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뭐야?”

“이제 엄마가 우리 아들한테 더 이상 해줄 게 없다. 엄마는 이제 떠나니까 아빠랑 누나랑 잘 살아. 이 돈으로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고”

“아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 아빠가 엄마 때문에 지금 얼마나 힘든데. 같이 이겨낼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엄마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겠다는 거야? 이깟 2만 원 필요 없어!” 

엄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내 손에 돈을 쥐어주려고만 했다. 내가 뿌려 쳐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으려 수그린 엄마의 등에 소리쳤다. 

“그렇게 엎드려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빌어 제발. 그리고 누나랑 나한테도 미안하다고 하라고. 여기 아빠가 써준 편지는 봤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엄마는 편지 옆에 돈을 반듯이 피고는 방으로 다시금 들어가 버렸다. 그것이 엄마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편지를 읽었을까. 엄마는 내게 오랜 궁금증을 남기고 그렇게 단 한마디 사과도 없이 그날 사라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편지는 그렇게 내 가슴에 남았다. 


[여보, 우리 처음 시작할 때 아무것도 없이 양푼이 냄비 하나로 시작했지 않소. 지금은 그때보다야 상황이 낫지 않겠소. 보리도 있고 성종이도 있고. 지난 세월은 다 잊을 테니,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고 남은 우리는 정들었던 집을 떠나 촌구석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보일러를 틀어도 냉방이 나오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원망하고 미워했던가. 그래도 때때로 거짓말 같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머니를 상상하곤 했다. 촌스런 동화처럼 내 생일에 운동장을 지나쳐 걸어오는 어머니를 그려보곤 했다. 사춘기 소년에게는 밉던 곱던 엄마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금 합치는 것을 꿈꿨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을. 


베를린 장벽에 손을 댔다. 이 벽 너머에 어머니가 있다. 그렇게 우릴 버리고 갔던 엄마가 안쓰러운 모습을 한 채 벽 너머에 살고 있다. 벽 안쪽에는 이제 다시금 먹고살 만 해진 아버지와 누나, 내가 있다. 마치 동독과 서독과 같다. 그러나 나는 이 벽을 허물 수 없다. 부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내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잃어버린 내 10대 시절과 그녀가 만들어 낸 고통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를 듣지 못했다. 나는 아직은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다. 한낱 개인도 이러한데 나라 단위가 되면 그 감정의 무게는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기적이리라. 베를린 장벽은 그렇게 내게 있어 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은 엄마와 내게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모래시계로 남았다.

 

베를린 장벽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브란덴부르크문에 도착했을 때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쳤다. 기적 같았다. 기적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엄마와 나의 화해도 생각보다 더 빨리 허물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금 떠오르는 엄마 생각을 떨치려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freebow!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당신도 나를 존중한다면 우린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차별하지 말아요. 우린 이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여전히 내리는 비와 젖은 바닥으로 비록 절은 하지 못해도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며 존중의 가치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베를린이기 때문이었을까. 질문의 수준이 남달랐다. 다른 곳에서는 왜 freebow를 하느냐는 정도였으면 베를린에서는 왜 지금 베를린에서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하느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나는 사진 찍으랴 손짓발짓을 동원해 freebow를 설명하랴 바쁜 오후를 보냈다. 


해가 질 무렵 FREEBOW를 마치고 가는 내게 어머니뻘 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사진을 청하며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한국에서부터 이러고 왔어? 대학생이지? 너무 멋있다.” 

대학생으로 인도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는 내 설명에 아주머니들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자식 얘기를 하셨다. 

“우리 아들이랑 나이도 비슷하네. 우리 아들은 군대를 늦게 가서 아직 군대에 있어. 아휴. 학생은 밥 먹었어?” 그러면서 돈을 주셨다. 나는 이 운동은 공짜라고 돈은 받지 않는다고 연신 거절했지만 아주머니들은 끝내 내 손에 돈을 쥐어주셨다. 

“괜찮아. 우리 아들 같아서 그래. 엄마가 주는 건 받아도 돼. 이걸로 저녁이라도 사 먹고. 몸 상하지 말고. 아무리 좋은 일 한다고 해도 부모님 걱정시키면 안 하니 못 하는 거야. 알겠지?”


어머님들이 주신 돈은 온기가 있었다. 나는 그 지폐가 손난로인 것 마냥 꼭 품에 안았다. 그날 어머니가 주시려고 했던 돈도 이렇게 온기가 있었을까? 우리 엄마도 지금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오후 내내 떨쳐내려 노력했던 엄마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나를 붙잡았다. 문득 엄마의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그 언젠가 벽을 허물고 그리운 엄마의 된장찌개를 먹으며 그동안 미워하느라 하지 못 했던 이 말을 하는 날이 올까. 나는 순간의 감정을 못 이겨 아주머니들에게 허리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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