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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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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05. 2023

03. 프랑스 파리, 한 밤의 오페라

나의 파리를 만들어 준 센 강의 오페라 

심야버스를 타고 런던을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45인승 대형버스 수십대를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배도 놀라웠지만 배 안 깊숙한 곳에 정차된 버스 안에서 기절하듯 잠든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영국을 떠나 유럽 본토로 향함에도 불구하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무리한 탓인지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다. 아직 여행의 초반인데도 런던 올림픽 덕분에 목표한 2012번의 맞절 중에서 4분지 1을 해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육체적 피로도 쌓인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휴식이 간절했다. 웅장한 건축물보다 그 앞에 세워진 벤치가 눈에 들어오고 버스 창 밖 화려한 야경보다 눈꺼풀에 덮인 어둠이 더 필요했다. 

 

한편으로 처음 이 여행을 계획했던 것처럼 도시 간 이동에 심야버스를 이용하면서 하룻밤 숙박비를 아낄 수 있어서 안도감을 느꼈다. 이동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이런 획기적인 이동수단을 한 달 이용권으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니! 물론 불편한 잠자리에 몸은 쑤셔오고 옆자리에 앉은 중동에서 온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때때로 천둥처럼 내 단잠을 깨우지만 비바람을 막아주고 내 여행을 이어가게 해 주는 이 버스가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난 10시간의 꿈에서 깬 나를 맞이한 프랑스, 파리를 만났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프랑스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중세식 복장을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부인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에펠탑, 자유와 낭만이 가득한 몽마르뜨 언덕, 인류문화의 축소판이라는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노트르담 대성당과 개선문 등의 건축물 등은 왠지 모르게 그러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파리의 첫인상은 기대하던 귀부인이 아니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낯선 이방인을 만난 파리는 전날 마신 술이 아직 덜 깨서 한쪽 눈이 채 떠지지 않은 20대 때의 나와 같았다. 지하철 승강장 곳곳에 흩뿌려진 오줌과 눈 풀린 노숙자들, 그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의 주머니를 탐내며 하이에나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매치기들과 한국에서 본 적도 없는 거대한 쥐떼들까지. 다시금 인도에 온 것과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기대가 실망으로 서서히 바뀌어질 때쯤 다행히 사전에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리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부서트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종차별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을 맞이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그다지 그러한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아침을 채우려 방문한 식당과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 그리고 버스 안에서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마주했다. 간단한 영어문장조차도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거나 왜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얘기하지 않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으며 괜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면 자국과 자국어에 대한 사랑이 있는 프랑스인이지만 한해에 수백만명의 외국인이 방문하는 관광대국의 모습으로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위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나라의 모습으로는 참으로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나의 존중의 FREEBOW가 꼭 필요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나의 FREEBOW혁명을 일으켜보자. 내가 기대했던 파리의 귀부인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자. 사명감을 불태우며 에펠탑으로 향했다.  

 

트로카데로 광장에 도착하니 에펠탑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에펠탑이 잘 보이는 광장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담요를 펼쳤다. 그리고 피켓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FREEBOW! I respect you!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던 파리지앵들과 에펠탑에서 기념사진을 찍던 관광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파리에서 첫 Freebow를 시작했다. 

 

브라질에서 온 모녀, 러시아에서 온 할머님, 중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과 함께 절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와 절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들 에펠탑 앞에서 한복과 갓을 쓴 이국적인 모습을 한 사람과 함께 사진은 찍고 싶어 했지만 넓은 광장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엎드려 절을 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 에펠탑을 찾는 사람들 대다수가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에서 사진만 찍고 곧장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내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판단 실수였다. 오전 내 에펠탑에서의 freebow를 실패 아닌 실패로 마무리 짓고 다음 장소인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나는 몽마르뜨 언덕을 올라가 사크레쾨르 대성당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몽마르뜨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과 같은 순백의 미를 품은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비록 종교가 다르지만 인류를 위한 마음은 같으리라 믿으며 속으로 응원을 바랐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여, 내게 힘을 줘! 그렇게 파리에서의 두 번째 freebow를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몽마르뜨 언덕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자신이 가진 기량을 내뿜는, 일종의 거리공연장이었다. 축구공으로 묘기를 하는 사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 저글링을 하는 사람들 등 여러 사람들이 몽마르뜨 언덕을 풍요롭게 꾸미고 있었다. 몽마르뜨 언덕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알고 거리낌 없이 다가왔고 내가 들고 있는 freebow 피켓을 읽고 먼저 절을 청해왔다. 에펠탑에서와 다른 성공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freebow를 설명하고 정신없이 절을 했다. 때때로 같이 사진을 찍고 돈을 주는 참여자들에게는 정중히 거절을 하고 당당히 얘기했다. “이건 무료예요. 단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가치만 기억해 주세요!” 그럴 때마다 내 가슴속에 자존감이 차 올랐다. 그래, 난 돈 때문에 이걸 하는 게 아니야.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얼마나 절을 했을까? 군대에서 다쳤던 오른쪽 무릎이 슬슬 쉬고 싶다는 반응이 올 때쯤이었다. 한참 동안 내 모습을 지켜보던 한 한국인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절을 하려 준비하는 내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프리바우 언제 끝나요? 끝나면 저와 저녁에 오페라 보러 갈래요?"

"오페라요?"

"파리에 오셨으면 오페라는 한 번 보고 가셔야죠. 같이 밥 먹고 보러 가요"

난데없는 데이트 신청에 설렘도 잠시, 밀려드는 freebow 신청자에 난 다섯 시에 끝이 난다고 말을 흐렸다. 그러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그럼 다섯 시에 다시 이곳에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섯 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난 후 freebow를 하는 내 머릿속에는 존중의 전달보다 돈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찼다. 안 그래도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지갑에 오페라를 보러 갈 여유는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해도 십만 원을 할 오페라와 또 어디로 갈지도 모를 저녁식사 가격이 부담되었다. 그렇다고 처음 본 사람에게 기대는 것도 마땅찮았다. 비루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 시에 다시금 돌아온 그녀에게 오늘은 저녁 선약이 있어서 같이 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아쉽다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안녕을 고했다. 나도, 그녀도 연락처도 서로 주고받지 않은 우리가 이 넓은 세계에 우연히 다시 만날 거라고 믿지 않았다. 몽마르뜨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며 괜스레 콧방울이 시렸다. 내 눈은 몽마르뜨 언덕의 석양보다 그녀의 뒷모습을 좇기 바빴다. 

 

그녀가 떠나가고 한참 동안 몽마르뜨 언덕 한 곳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이제는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될 때쯤 언덕을 내려와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파리의 모든 것들이 돈으로 보였다. 어느 한 다리 위를 건널 때는 다리에 걸린 사랑의 자물쇠들을 보면서 짜증을 냈다. 못 해도 저 돈이면 인도에서 하루치 밥값일 텐데.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밥값을 저렇게 주렁주렁 걸어놓다니! 

분수대에 던져진 동전을 보면서도 화를 냈다. 저기가 뭐라고 아까운 돈을 던져 놓는 거지? 소원을 빌 거라면 스스로 간절하게 바라고 노력하면 되지. 돈만 바치면 소원을 다 이뤄준다고 믿는 것 자체가 욕심 아니야? 화는 화를 불러 종내에는 나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말이 좋아 이동식 숙소지, 부족한 경비에 웅크려 잠을 청하는 버스 안의 노숙자가 아니냔 말이다. 그런 주제에 주는 돈도 거절하고 스스로 뭐가 되는 줄 아는 내 꼴이 얼마나 우습냐. 그 돈을 받았으면 이렇게 걸어가지도 않고 버스를 탔을 수도, 그녀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이 없는 현재의 나에 대한 분노는 점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원망을 만들어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촌지를 주지 않는다고 틈만 나면 나를 불러 때리던 담임선생님. 고등학교 때 이혼 후 급격히 기울어진 집안 사정에 반 친구들 앞에서 보조금 수령자로 나를 부르던 담임선생님. 가고 싶던 서울의 대학교가 아닌 지방국립대 진학을 원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큰 빚을 내고 집을 나간, 우리를, 나를 버린 어머니. 지금의 경제상황을 만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물밀듯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돈에 대한 아쉬움, 스스로에 대한 화로 파리를 배회하며 센 강변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 코리안 보이!” 주변을 둘러보니 강둑 위에는 나 밖에 없었다. 강둑 밑을 보니 몇 명의 외국인 남성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나를 불렀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맥주를 들며 이리 와서 한 잔 하자고 말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겁이 나긴 했지만 지금 같은 기분에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나는 뛰듯이 강둑을 내려 그들에게로 갔다.  

 

내려가서 자세히 보니 건장한 백인 남성 3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앉은자리를 벌려 내 자리를 마련해 주고 맥주를 건넸다. 연신 땡큐를 외치며 맥주를 입에 들이부었다. 메마른 대지가 빗물을 흡수하듯이 내 몸은 목구멍을 넘어 들어오는 알코올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그들은 그런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인 줄 알았던 그들은 다들 좀 전에 만난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 온, 무릎에 기타를 품은 사람이 지나가는 독일인 남성, 이탈리아 남성을 나처럼 불러 앉힌 것이었다. 미국인 남성은 안 그래도 오후에 나와 같이 절을 했다며 자신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나는 freebow를 해줘서 고맙다고 술병을 부딪혔다. 미국인 친구는 영어가 부족한 나를 대신해 옆에 다른 외국인 친구들에게 freebow를 설명하였고 다른 친구들은 그 얘기를 듣고 훌륭하다며 건배를 해왔다. 빈 속에 맥주라 금세 올라오는 취기에, 새로 만난 친구들의 호탕한 웃음과 칭찬에 굳어 있던 내 얼굴에도 다시금 웃음이 생겼다. 그걸 보더니 미국인 친구가 얘기했다. 

 

헤이 브로, 너 오후에 봤을 때는 표정이 좋았는데 아까 걸어가던 모습이랑 여기 처음 앉았을 때는 슬퍼 보였어. 무슨 일 있었어? 그냥 힘들었던 거야?”

나는 처음 본 그들에게 몽마르뜨 언덕에 있었던 그녀와의 짧은 만남과 이곳에서 너희들을 만나기까지 했던 생각들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꽤나 긴 이야기였음에도 집중해서 얘기를 듣고 있다가 친구들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웃어서 미안해.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지 않잖아? 왜 혼자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넌 누군가에게 몇 년치 밥값을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어.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꿈인 파리에 있지. 왜 네가 가진 것에, 그리고 네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에 먼저 감사하지 않아?” 

미국인 친구도 얘기했다. 

넌 대학을 다니고 있잖아? 미국에도 대학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못 가는 사람도 많아. 그리고 사실 난 오늘 잘 곳도 없어. 그래도 별로 걱정되지 않아. 어떻게든 잘 되겠지.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걱정한다고 지금의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네가 바꿀 수 없는 것들로 너를 고통에 빠지게 하지 마.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나는 그들의 위로를 들으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흐느끼는 나를 보며 그들은 좀 전보다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 여전히 아까 그 여자랑 오페라를 못 본 게 아직까지 슬픈가 봐. 우리랑 있는 게 즐겁지 않나 본데?”

그러니까. 야. 이러지 말고 노래라도 불러주자. 오페라는 아니라도 콘서트는 해줄 수 있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노래가 생각났어”

그러고는 기타를 잡고 음을 켰다. 나도 아는 더 비틀스의 헤이 주드(Hey, Jude)였다.

나도 그들을 따라 아는 부분을 함께 부르고 모르는 부분은 흥얼거렸다. 그들은 때때로 주드 대신에 내 이름을 넣어 불렀다. 

“Hey Noh, don’t make it bad” (이봐, 성종, 상황을 나쁘게 만들지 말아)

그렇게 시작된 한 밤의 센 강 콘서트에서 몇 곡의 명곡이 우리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동안 난 몇 차례나 울고 웃었다. 우리의 콘서트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파리의 경찰에 의해 끝이 났다. 알고 보니 늦은 밤에는 센 강변에 출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친구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가는 내게 소리쳤다. 

헤이 브로! 난 널 존중해! 넌 할 수 있어!” 

 

센 강에서 멈췄던 귀갓길을 다시 이어갈 때 내 기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이것이 취기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면 처음 본 나를 위해 진심 어린 조언과 노래를 불러준 친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애써 참지 않았고 그들이 해준 이야기를 곱씹고 또 되씹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었다.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무엇을 만들어 갈 것인지였고 내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였다. 삶은 자신이 가진 자산이나 타인의 평가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는 옛 선인의 이야기가 뼈 저리게 다가왔다. 나는 그 친구들 덕분에 흔들리는 삶에 대한 태도를 다시금 붙잡을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리고 이 파리에서의 밤을 내 인생의 신화로써 오페라로 만들어준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그들 덕분에 내게 파리는 영원한 귀부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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