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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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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05. 2023

04. 네덜란드, 나의 붉은바다거북이와의 추억

파리에서 네덜란드로 가는 심야버스 안, 잊지 못할 그녀와의 대화

다음 목적지인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파리의 버스터미널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행 심야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버스플랫폼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품고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중동에서 온 듯한 아저씨는 보따리가 큰 걸로 보아 물건을 팔러 가는 가보다. 단아하게 차려입은 저 노부인은 네덜란드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일까? 술에 취해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저 아저씨는 오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마음은 안 좋지만 제발 나랑 같은 버스에 타지 않았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기 몸만 한 큰 배낭여행 가방을 둘러멘, 아담한 동양인 여성이었다.  저 작은 몸으로 저렇게 큰 가방을 메고 있으니 마치 대서양을 헤엄치는 붉은바다거북이 같았다. 호기심에 그 여성을 뒤에서 훔쳐보던 나는 잠깐 뒤를 돌아본 그녀를 보고 숨이 멎을 듯했다. 짧은 단발에 흑요석 같은 까만 눈을 가진 흰 피부의 그녀는 정말 일순간 내 숨을 뺏을 정도로 예뻤다. 그녀 역시 괴상한 옷차림을 한 나를 보며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다시금 고개를 돌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소원을 빌었다. 저 붉은바닥거북이 소녀가 향하는 곳이 제발 나와 같기를. 부디 잠깐이라도 저 소녀와 헤엄치다 헤어질 수 있게 되기를. 

 

난 운이 참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가끔 하곤 했는데 그 모아둔 운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맙소사! 그녀는 네덜란드로 가는 버스에 자신의 배낭을 넣기 시작했다! 바랐던 것과 같이 같은 버스에 타는 것이었다. 청년의 욕심은 좀 더 커졌다. 말도 안 되는 청춘드라마 같이 이 넓은 버스에 그녀가 내 옆자리이기를. 그렇게 나에게는 헛된 희망, 그녀에게는 찜찜하고 불편한 욕망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기웃기웃 거리며 내 좌석을 찾다가 내 좌석번호 옆에 앉은 그녀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칠 뻔했다. 가까스로 내 입을 부여잡고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가 쪽 내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그동안 쌓인 여행의 냄새가 그녀에게 악취로 다가가진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들로 좌불안석, 괜히 창가에 바짝 붙었다. 

이 버스, 네덜란드로 가는 게 맞나요?”

조금은 어색한 영어가 오른쪽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였다. 먼저 말을 걸어올지 몰랐기에 당황한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버스예요” 

그녀는 다행이라며 걱정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씌었나 보다. 이토록 웃는 모습이 예쁘다니! 참, 그것보다 이 목소리는 또 뭔가? 책에서만 나오던 정말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아니냔 말이다. 나는 용기를 쥐어짜 냈다. 한 번 더 목소리를 들어보려 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노성종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온 아카네입니다.” 


역시 일본에서 온 사람이었구나.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세계배낭여행 중이었다. 유럽에 오기 전 중동의 요르단을 거쳐왔다는 그녀는 내게 낙타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며 여행하며 느꼈던 추억을 풀어냈다. 그녀는 생각보다 파리가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나는 파리에서 만났던 외국인 친구들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내게는 꽤나 만족스러운 곳이었다고 자랑했다. 

성종 씨도 그럼 배낭여행 중이에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묻는 그녀에게 나는 인도에서의 인턴생활과 그곳에서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현재는 freebow라는 운동을 기획해서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흥미로워하며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도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갔다. 

 

사실 일본인을 만난 것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이 원래 이렇게 친절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친절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다른 국적을 가진 우리가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통해 이렇게 긴밀하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녀가 말했다. 

잠 오지 않아?”

늦은 밤이었고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그녀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또 한참을 돌아다녀야 해서 사실 잠이 간절했지만 그 순간만은 잠도, 다음날 freebow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난 괜찮은데 너는?”

사실 나는 버스에서 잠을 못 자서. 그리고 혼자서 여행하다 보니까 겁이 나서 잠이 더 안 오는 것 같아. 너만 괜찮으면 계속 얘기하고 싶어”

이래서 연애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연애상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그녀의 얘기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벌써 손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밤은 깊어 갔고 버스는 시원하게 그 밤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카네와 나는 20대라는 시대의 대서양을 헤엄치는 붉은바다거북이와 한 마리의 멸치로 자유롭게 유영했다. 사실 아카네는 우아하게 헤엄쳤고 나는 허우적거렸지만. 중간중간 서로가 서로의 단어를 못 알아들을 때면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거나 내 손바닥에 그녀의 검지로 손글씨를 썼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때때로 알아들으면서도 모른 척 그녀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거나 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못난 놈! 이기적인 놈! 아카네의 순수한 마음을 악용하다니.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나는 혈기왕성한 스물여섯이고, 아카네는 이렇게나 예쁜데 말이다. 

 

성종은 한국에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취직?”

글쎄, 부끄럽지만 아직까지 뭐 할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어. 사실 한국에서 내 친구들은 다들 취업에 열심히지만 나는 조금 이상한 학생이었어. 내가 대학에 온 것은 취업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대학에 말 그대로 큰 공부를 하러 온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살았거든. 그래서 취업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어”

전혀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멋진데? 나도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했는데 직장생활이 생각만큼 멋있거나 또 나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더라. 그러다가 문득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얼마 후 비행기를 탔어.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고 있고”  

미안하지만 아카네에게 인생을 돌아보게 해 준 너의 전 직장에 감사하고 싶어. 덕분에 이렇게 너랑 만날 수 있었잖아.” 

그녀는 느끼한 내 얘기에 조용히 웃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 화답하며 아버지와의 일화를 전했다. 

 

20살 때 나는 자율전공학부를 선택했다. 19살까지 평생을 입시 공부만 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한다는 게 웃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1년 동안 대학생활을 하며 하고 싶은 전공을 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전까지 인생이 그러했듯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정하지도 그렇다고 알 지도 못했다. 군대를 가자. 군대 2년 동안 다시 생각해 보자. 

 

제대 후 건장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를 아버지께서는 곧장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무슨 과를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어깨를 펴며 당당히 얘기했다. 

사회복지학과를 갈까 합니다. 지금껏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받은 은혜, 사랑을 세상에 돌려주며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다 물 잔에 소주를 가득 담아 혼자 드시며 읊조리듯 말했다. “2년을 기다렸는데 네 녀석은 하나도 깨달은 게 없구나”

그때는 아버지께 실망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사회에서 노가다라고 천대받으며 애써 모은 돈으로 아들 대학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란 놈은 여전히 꿈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어?”

아니, 경영학과”

그녀는 더는 못 참겠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로도 우리는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그러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순간 무엇인가 내 어깨에 닿았다. 그녀의 머리였다. 버스 안에서 잠을 못 잔다던 그녀가 내가 있어서일까? 이렇게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다니. 나는 행여 그녀가 깰까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저 별들 중에 가장 여릿여릿하고 가장 반짝이는 별 하나가 가던 길을 잃고 내게 내려와서는 이 어깨에 기대어 잠든 것이라고요”

소설 속 양치기가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온 것은 애정이 아닌 순수한 신뢰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기에 삿된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잠든 그녀를 이따금 바라보며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한 대화는 경쟁이나 허영 없이 고요한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 말처럼 그날 프랑스 파리에서 네덜란드 잔센스칸스로 가는 버스 안, 아카네와의 대화는 가장 행복한 대화 중 하나였다. 


10시간의 긴 운행이 끝나고 우리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날의 일정을 함께 했다. 함께 네덜란드의 풍차마을 잔센스칸스를 걸으며 서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같이 여행했다. 하이네켄 맥주공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주량을 놀리고 안네의 집을 방문해서 같이 슬퍼하며 서로의 눈물에 공감했다. 그녀는 때때로 멈춰서 다른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절을 하는 나를 보며 사진을 찍기도 하며 기다려 주었다. 그러고 일련의 행위가 끝난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웃어주었다. 그 모든 곳, 그 모든 순간에 아카네가 있어서 행복했다.  


아카네는 네덜란드에서 며칠을 더 머문다고 하였다. 나는 그날 저녁 바로 독일로 떠날 계획이었다. 꿈에서 깰 순간이었다. 소설 속 양치기처럼 아가씨와의 만남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부족한 마음에 그녀와의 만남에 흙탕물을 묻히기 싫었다. 딱 여기까지가 서로의 인생에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기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아카네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그녀와의 짧았던 만남을 뒤로하였다. 그날 밤 암스테르담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참 다행이었다. 


“성종,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넌 잘할 거야. 네 꿈을 응원할게”


그녀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담고 암스테르담을 떠났다. 잠깐 내 어깨에 내려왔던 별, 나의 붉은바다거북이 아카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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