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아껴오신 푼돈과 바꾼 당신의 삶
이 글은 아버지가 돌아셨던 해인 2013년 여름에 썼던 글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많고 다시 읽는 것조차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한 구석이 많지만, 퇴고 없이 올려봅니다. 아버지는 건설업계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고, 작은 여행사에 소속되어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운전기사로서의 삶을 10년 조금 넘게하시다가 2013년 봄에 작고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운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하십니다. 이 글은 당시에 어떤 작은 공모전에 냈던 글로, 브런치스토리에 처음으로 올려보게 되네요. 부족함이 많은 만큼, 좀 더 독창적인 생각과 문체를 가진 사람으로 발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보려 해요.
유난히도 발걸음이 무거웠던 그날 밤. 병원에서 홀로 돌아온 집에는 덩그러니 남겨진 아빠의 안경, 핸드폰 그리고 몸의 고통으로 인해 끝끝내 오지 않던 추운 밤을 아빠와 같이 한 솜이불만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왠지 그날은 집에 돌아오기 싫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양팔로 하트를 그리며 애써 웃으며 인사하는 아들에게 힘없는 손 인사를 해주던 힘에 겨운 마지막 눈빛.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가 마주한 것은 아들에게 밥 먹었냐 인사 한 마디 건네줄 수 없이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누워있는 말이 없던 아빠. 무시무시한 병마를 막아주는 것과, 사랑한다고 쑥스러운 말 한 마디 건네는 것. 어떤 것이 더 제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이제는 대답이 없는 아빠에게, 33년이 지난 그제야 하고 싶었던 말들을 속삭여보았습니다. 더 이상 바보 같을 수 없는 늦은 사랑의 말. 아마 마음속에 오롯이 담고 떠났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자기 사람만 사랑할 줄 알고, 정작 자기 자신은 사랑할 줄 모르는 바보. 저는 그러한 우리 아빠를 꼭 빼닮았습니다. 내 마음이 허락했던 것보다는 이른 시기에 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던 아빠. 전철 무임승차가 가능한 나이가 되어도, 씩씩하게 표를 사서 전철을 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아들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100원 한 푼이 아까워 벌벌 떨며 돈을 아끼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퇴직 후 승합차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외국인 관광객의 발이 되어준 지 벌써 10년. 여느 자식들처럼, 저 또한 아빠라는 존재가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것 같네요. 어쩌다 받아온 팁은 엄마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식탁에 스리슬쩍 내놓으시고는, 정작 당신께서는 500원짜리 빵에 200ml 우유 한 팩으로 끼니를 때우시던 미련한 바보. 여행사에서 식대로 나오는 5000원을 아끼려, 구태여 보온 기능을 잃어버린 도시락에 변변치 못한 밥과 반찬을 스스로 싸가서는, 식어버린 도시락으로 버텨온 지난 10년. 결국 그 미련한 가족사랑은 병마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이 있은 후에도, 식어버린 도시락은 늘 일터에서 아빠와 몇 달 간을 더 같이 해야 했습니다. 항상 배를 따스하게 할 수 없을 만큼 식어버린 국과 반찬 그리고 찬밥. 그리고 그렇게 아껴온 몇 푼과, '나이가 들었기에' 받을 수 있던 노령연금은 결국 병 들어버린 아빠의 아픈 몸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감사해야 할 혜택이, 어찌 그리 야속하게만 느껴지던지, 연금 없이 건강하게 잘만 살아오던 지난 10년 전, 아니 20년 전으로 돌아가고만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인생은 착하게 산다고 좋은 일만이 생기는 것도 아닌, 열심히 산다고 잘 사는 것만이 아닌, 그렇게 변덕이 심한 바다의 날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나서 저를 장군이라며 예뻐하며 키워준 아빠는, 이제는 제 앞에 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아기가 되어 제게 생의 마지막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비교적 남들 보다는 일찍 아빠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여생을 함께 하기 위해서 5년 넘게 몸담아 온 회사를 퇴사하였고, 생애 그 어느 때보다 소중했던 아빠와의 1분 1초를 같이 했습니다. 노령연금이 병원비의 일부로 쓰인다는 사실은 감사하면서도, 이를 위해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을 고생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습니다. 병실 안의 다른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폐가 될까 아픈 티도 못 내고 꾹꾹 눌러 담기를 2주. 그렇게 도망가듯이 아빠는 무심하게도 눈을 감았습니다. 더 이상 막걸리 한 잔의 술벗을 해줄 수도, 오늘 점심 또 빵 먹지 않았냐는 장난 섞인 구박을 할 수도 없이, 말이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가 떠난 지 2달여. 지난 달 처음으로 유족 연금을 수령했습니다. 엄마와 입을 모으길, 아빠가 우리 둘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라고 아끼고 아껴서 남겨준 선물이라고. 첫 유족연금으로 꼭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저 슬픔 잊고 열심히 살라는 아빠의 유언을 따라 알뜰히 이를 살림에 보태려 합니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마음에, 지난주에는 아빠가 좋아하던 냉면집을 찾아, 불과 3달 전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둘이 냉면을 같이 먹었던 꼭 그 테이블에 앉아 아빠가 아닌 엄마와 같이 냉면을 같이 먹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던 어느 순간부터는, 어쩌다 한 번 외식을 하게 되면 아들이 계산을 해왔네요. 아직은 아빠가 사주는 밥을 먹고 싶고, 아빠가 차려주는 퇴근 후의 저녁밥을 먹고 싶은데, 이렇게 구슬프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위해 유족연금을 남겨주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홀로 된 어머니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이 되는 감사한 제도. 또한 아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통로.
아빠의 암으로 인해 15년 살던 집에서 이사 와야 했던 바로 전날, 같이 마지막으로 소파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던 것 기억하지? 사진 속의 나는 지금도 웃고 있지만 사실 난 정말 어금니가 부서져라 눈물을 참았어. 이렇게 마지막 아빠의 흔적으로 남겨진 유족연금으로만 아빠를 만나야 하지만, 열심히 잘 살아갈게. 지금 다시 드는 생각인데, 좋은 직장 찾으면 그 돈을 생활에 보태고, 앞으로 수령할 유족연금은 알뜰히 모아서 나 결혼하는데 보태야겠어. 그러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안 아프게 잘 쉬고 있지? 엄마와 나는 아빠가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고 즐겁게 살게. 사랑하고 또 사랑해 아빠. 아들 승승장구 한다고 약속했으니 두고 봐. 하늘나라에서 내 자랑 많이 할 수 있게 성공할게. 보고 싶어 아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