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없이 올리는 15년 전 사춘기 반감기에 남겨놓은 흔적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돈을 주고도 못 하는 일’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랑의 결실을 맺어 백년가약을 한 후, 12년 후 아빠와 야구를 할 블루 미니미가 태어날 것인가 혹은 12년 후 엄마의 화장대를 탐내기 시작할 핑크 미니미가 태어날 것인가에 대한 결과. 그리고 둘째는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일. 나를 닮은 핑크 미니미 한 개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많은 내 주위 사람들이 우려하는 일임과 동시에, 나 스스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인지라 상상만해도 답답함이 앞설 노릇이다.
그러나 둘째로 언급했던 ‘시간 되돌리기’가 가능하다면, 첫째의 미니미 프로젝트 또한 나의 소망이 반영될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표면적으로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두 소망, 이 두 소망은 불현듯 ‘향과 냄새’의 이야기에 스며든다. 냄새라는 것 자체가 기억을 지배하고, 기억이라 함은 이미 그 단어에 ‘과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이 자체로도 우리의 간이 타임머신이 되어주고 있다. 지난 주말, 우연히 찾은 지인의 집에서 마주했던 유아기의 아이 둘에게서 또 다른 향의 세계를 느꼈다.
/남이 하면 ‘낭만’, 내가 하면 ‘노동’/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나 아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귀여운 시선을 듬뿍 보내며 한 마디씩 던져본 기억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을 한다. ‘아이가 인형 같고 참 사랑스러워서 며칠만 키워봤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의 초보엄마들의 반응은 이렇다, ‘네~ 제발 며칠만 데려가주세요~’. 초보엄마의 고뇌는 아기 손에 묻은 요구르트 냄새, 문고리에 묻은 초콜렛 냄새 그리고 거북하지 않은 귀여운 향이 묻어나는 기저귀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훗날 내가 내 미니미의 아빠가 된다면, 아마 이 냄새들을 기억하며 내 눈앞에 놓인 가사와 육아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내게는 낭만인 ‘육아’, 그래서 그 송편 같은 손을 씻어주는 시간과 그 후에 아가손에 남을 비누향을 기다린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던 엄마의 사랑/
키가 작던 시절에는 식탁 위를 내려다 볼 수 없고, 부엌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리고 가스레인지는 전적으로 음식을 위한 도구였고, 그 위에서 왜 나의 속옷과 수건이 뜨겁게 끓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부분부분 찌그러지고 검게 그을린 그 세숫대야의 촉감과 끓고 있는 빨래가 거품을 터뜨리며 내뿜던 그 ‘삶은 빨래’의 냄새를 기억한다. 그리고 가스레인지는 아기들의 젖병 또한 끓여내며, 묵묵히 역할을 소화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나, 후에 건조된 빨래는 고스란히 그 끓는 냄새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애기냄새의 일종이라고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방금 옷장을 열어 세탁기로 빨래가 된 러닝셔츠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분명 옛날의 그것이 아니다. 내게 아로마 테라피가 있다면, 바로 삶은 빨래 그 자체이다.
/엄마와 맘마/
이 두 단어는 아기들이 가장 처음 배우는 단어일 듯 하다. 실제로 필자가 어렸을 때는 아기들이 먹는 분유의 브랜드 중, ‘맘마’라는 브랜드名이 있었다. 아마 내부가 은색 빛이던 이 통은, 어느 시골 마을의 창고에서 조미료를 담는 통으로 20년이 넘도록 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유통을 열었을 때 분유가루가 살짝 떠오르면서 풍기는 아기 같은 향이 기억난다. 학교를 들어가고 나서도, 분유가 맛있어 사촌동생의 분유통을 몰래 열던 기억이 있다. 아주 약간 비릿하면서도 스위트하다는 느낌이 나는 그 가루와 온전히 그 가루를 따스한 물에 담아내던 젖병꼭지의 촉감. 이 모두가 엄마의 사랑이고, 우리의 추억알갱이들이다. 시집 장가가면 부모님 생각이 더 난다는 말의 의미는 대략 알고는 있지만, 아마 이런 곳곳의 냄새가 불러오는 아기시절의 기억 또한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이 ‘맘마’의 사진을 찾아낼 때까지 나의 웹서핑은 계속 된다.
/Breeze같은 시원함을 아기에게/
아기들이 기저귀를 갈고 나서 바르던 땀띠방지용 분. 다행히도 이것의 사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초록색 그 통이다. 아직까지는 나는 표현력을 더 연마해야 할 것 같다. 이 향기롭고 달콤하고 때로는 귀여운 향들을 글에 담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표현력으로서는, 독자 분들도 함께 기억하고 있을 그 향에 대한 기억을 같이 불러오길 독려하는 수밖에 없다. 이 분의 향, 귀엽다. 퇴근 후 샤워 후에 맞는 밤바람 같은 느낌? 아니면 휴일 아침 문득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잠들 때의 그 포근한 느낌? 혹은 뉴에이지 피아노곡 하나를 ‘가운데 페달’을 눌러놓은 채 연주하는 몽글몽글한 느낌? 그 지인의 집에서 나는 짧은 시간에 다수의 기억을 소화하느라 마음이 바빴었다. 내가 그 아기였고, 그 누나는 나의 엄마였다.
/크레파스는 녹는다 그리고 타오른다/
어린 시절 방학 숙제로, 아빠와 함께 크레파스를 녹여 초를 만드는 숙제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때 처음 알았다. 크레파스는 심지를 통해 타 들어 갈 수가 있구나. 케이블 티비에서는, 바닥에 그려진 아이들의 낙서가 쉽게 지워지는 장판을 광고하기도 한다. 크레파스도 아이들이 몸에 바르는 냄새 중, 상위권을 차지할 것 같다. 12색 크레파스를 가진 나는 36색 크레파스를 가진 친구의 위풍당당함에 기가 죽기도 했고, 내겐 없는 ‘에메랄드 녹색’의 크레파스를 몰래 훔쳐 쓰기도 했다. 그래서 크레파스가 내게 남긴 냄새와 그 냄새가 남긴 기억은 다소 울적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몇 년 후 미니미의 아빠가 된다면, 크레파스만큼은 최상위 급으로 선물을 하려 한다. 크레파스의 성분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나는 나의 미니미와 함께 스케치 북을 채워가며, 크레파스의 기름기 가득한 냄새에 후각을 열어놓을 것이다.
일로 바쁜 아빠의 정이 그리운지, 계속 내게 안기겠다며 팔을 뻗던 두 살 배기 아기는 아마도 나의 까칠했던 수염과 스킨 잔향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많은 아줌마들을 뒤로 하고 내게 안기려 했던 것은, 분명 아 아기의 선택이었고,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아기들이 엄마의 등에 업혀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듯, 내 미래의 미니미는 내 얼굴이 주는 촉감과 내가 풍기는 스킨향 섞인 체취에서 심적 안정감을 찾을 것이다. 오래 전의 내가 그러했다. 오히려 좀 허무한 기분이다. 실존할 수 없는 가상의 타임머신을 타고 혼자만의 투어를 마친 이 시간, 차라리 하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독자 여러분 모두, 지금의 미니미 혹은 미래의 미니미에게 있어서, 연주하기 어려운 ‘내림 마 단조’ 뒤의 ‘다 장조’ 같이 편안하고 에센셜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