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이 올리는, 지금보다 더 초보필자 시절의 글
“몇 년생이라고? 아니, 그 때도 사람이 계속 태어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 때가 있었다. 인터넷 동호회의 정기모임을 나가면 최소 6살 이상 차이가 나던 형, 누나들이 필자를 신생아 취급하며 이르던 말이다. 그 후 나도 그네들의 나이가 되고, 또 그네들의 나이를 지나서 살며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가 어리게 보이고 아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느낌이라는 것. 6학년이 되면 학교를 주름잡을 수 있다고 기대했던 5학년 시절, 중3이 되면 한 뼘은 커진 키로 밸런타인 데이에 후배 여학생들의 선물보따리가 내 사물함을 장식할 것이라 상상했던 까까머리 중2. 그리고 싱그러운 봄 햇살 내리쬐는 캠퍼스를 거닐면 저절로 여자친구가 생기고, 한 달에 세 번 미팅에 밥은 무조건 깔끔한 돈가스만 먹게 될 줄 알았던 졸린 고3 시절. 또한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생이라는 또 다른 사회계층이 되면 몸이 노쇠하고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던 까까머리 국방부 소속 26개월. 지금은 직장인의 몸인 내가 바라보기엔 위의 모든 존재가 ‘아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성을 떠나, 정말로 내가 어린 아이이던 시절이 있었다. 단정지어 10살이라고 하자. 유독 어렸을 때부터 내 코는 민감한 편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의 짙은 화장품 냄새는 ‘학원 가기 싫은 냄새’, 출근 전 아버지의 밥상에 놓여진 콩나물 한 그릇은 ‘아빠냄새’였고, 어머니께서 일을 다니시던 예식장 미용실 안의 홍어냄새같이 톡 쏘는 파마약 냄새는 ‘엄마가 일하는 냄새’였다. 그리고 동생이 동네의 빵집에서 간식으로 사서 가져가던 카스텔라 냄새는 ‘내 동생이 먹는 욕심을 내는 귀여운 냄새’.
그리고 우유를 좋아하던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투명 병에 담긴 흰 우유 냄새. 물론 이것은 지극히 기분 탓일 것이다. 팩에 들어있는 우유와 병에 들어있는 우유가 딱히 다를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파스텔 톤 하늘색의 비닐 뚜껑을 열고 첫 모금을 들이킬 때 맡을 수 있던 그 투명한 병의 맛이 좋았다. 전편의 글에서도 말했듯, 우리의 ‘오감’을 가지고 정해진 곳에서만 오감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며, 삶을 덜 다채롭게 하는 주범이다. 우유향은 그대로였고 나는 그 투명한 우유병이 맛있었다. 차가운 병이 내 치아에 부딪히는 느낌, 왠지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면 그 병의 맛과 우유의 향이 사라질 것만 같던 소소한 두려움. 그리고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병의 주둥이를 흘러내리는 두 세 방울의 우유가 더 달달한 것 같았던 착각. 우유의 비릿한 달달함은 코로 마시고, 혀로는 병이 주는 촉감을 맛보았다. 투명한 촉감을.
식탁에서 햄을 볼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정말 할 반찬이 없다고 판단을 할 때뿐이다. 그렇다면 스테인리스 숟가락, 그 위에 얹어진 따스한 쌀밥 그리고 그 위에 위태하게 올려진 햄 한 조각. 그 숟가락이 편의점 도시락에서 볼 수 있는 일회용 숟가락이라고 상상을 해보자. 그것은 마치, 계란 후라이를 해주고서는 흰자만 먹어야 할 때의 허전함과 같을 것이다. 그 단단한 쇠붙이가 쌀밥의 뜨뜻한 기운을 감싸고 그 쌀밥이 아슬아슬하게 햄 한 덩어리를 받친다. 나는 그 햄의 짭조름함에 어우러진 숟가락의 단단함이 맛있었다. 그 역시 내 미각이 숟가락을 맛보고, 내 후각은 햄을 맛보던 ‘오감의 무질서‘.
그러고 보니 필자의 구강기는 꽤나 오래 지속이 되었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이 알리길,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대략 1세 반(1년 반)이 되기까지는 구강의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가고, 자기와 非자기에 대한 구분을 하기 시작하며 자아기능을 발달시켜 나간다고 한다. 물론 필자는 신생아처럼 엄지를 입에 물거나, 어떤 물건을 물어뜯지는 않는다. 단지 후각을 통해 만나고 있는 세상을 나의 미각, 청각, 촉각, 시각에 공유시키려 할 뿐이다. 아기가 맞는 앙증맞은 구강기와는 한 차원 다른, ‘후각’이 가미된 다소 ‘고상한 구강기’라 하겠다. 이 고상한 구강기의 정점을 찍은 아이템이 있었으니, 초록색 모자를 쓴 아주머니께서 배달해주시던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
지금도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뚱뚱한 투명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 나는 엄마(어머니는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에게 물었다, 주스 병에 빠알간 글씨로 쓰여있는 ‘무가당’이 무엇이냐고. 그 질문에 엄마는 ‘응, 무가당은 안 단 거야’ 라는 답을 내어놓으셨다. 사전적 의미는 ‘설탕 따위의 당분을 첨가하지 않은 것’이다. 혀가 약간 따가운 느낌의 톡 쏘는 시큼함은 있었지만, 나는 그 병이 주는 청량한 시각적인 효과를 미각으로 전이시켜, 혀로는 병을 맛보고 무가당의 냄새는 코로 들이마셨다. 지금도 나는 주스를 마실 때 펫트병에 담긴 그것이 아닌 병에 담긴 주스를 마신다. 일부러 병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가다가, 내가 그렇게 병에 담긴 주스를 찾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뿐. 여러분도 여러분의 미각이 얇은 막의 주스를 가운데에 두고 투명한 주스병이 ‘만남'을 가질 때 느낄 수 있는 ‘맛남’과, 그 사이 코를 스며드는 무가당의 청정함을 느껴보기를.
내가 느꼈던 음식과 음료의 냄새와 맛에는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내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이 지배를 받았다. ‘투명한 병’은 우유와 주스라는 평범한 식음료를, 그 시절을 담아둘 수 있는 일종의 사진첩으로 변신시켰다. 냉동실에 얼려 먹던 유산균 음료의 끈적함과 달착지근함도 그와 비슷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시절까지도 나는 동생이 쓰던 달콤한 맛의 어린이 치약을 훔쳐 쓰곤 했다. 만약 그 시절의 맛들을 내가 다시 미각과 후각을 모두를 통해 흡수해본다면, 지금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추억들을 쏟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상대적으로 ‘아기’ 혹은 ‘어린 사람’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내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어리다고 느껴지는 그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나와 같이 다양한 감각으로 음식물을 맛보고 느끼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오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글을 통해 그것을 재발견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추억을 2차원적인 평면에 기록하고 곱씹는 것보다는, 이러한 무질서한 오감을 장식으로 달아놓는 것이 우리가 버리기 아까운 추억을 한 컷이라도 더 입체적으로 간직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산만함’은 부정적인 단어일까? 산만함은 창의와 상상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무질서’, 부정적일까? 무질서는 다양함, 다채로움의 시작일 수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러한 오감의 무질서를 즐겨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