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에세이] 어쩌면, 우리는 이미

미련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남긴, 사춘기 반감기 시절의 흔적

나도 모르게 지나친 그 사람


집 앞 놀이터에서 280원을 가지고 투닥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간지럽고 귀여운 음성이 저의 달콤한 주말 낮잠을 깨웠습니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문득 저의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 모니터 안에 그려집니다. 지금도 인사동 거리에 나가면 옛날 문구점을 연상케 하는 1평 남짓한 조그만 가게를 볼 수 있는데요, 그 가게 안에 진열된 장난감, 스티커, 딱지, 액세서리 등의 가격이 방금 아이들이 싸우던 백 원짜리 동전 몇 개 수준이죠. 100원짜리 하나면 조립식 장난감 한 통, 딱지 몇 개, 종이 인형, 초코파이 하나 정도는 사먹을 수 있었고, 500원이면 어린이로서는 거의 못 할 게 없는 큰 돈이었습니다. 반면 요즘은 어떤가요, 80~90년대의 물가에 비하면 ‘동전’이라는 화폐를 가지고 어린이들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되어버렸는데요, 아마 지금 우리가 보는 아이들도 어른이 되면 저와 똑 같은 생각을 하게 되겠죠.


저는 생각합니다. 돈이라는 것, 한 번 태어나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떠돌이 인생을 살게 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주인이 바뀌는 지폐 동전들이 세상에 가득하잖아요. 그 중에는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흙 속 또는 강물 속에서 익사하며 인생을 마무리는 하는 돈들도 있을 거고요. 100원이면 심신이 행복했던 그 시절 저는 가끔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 동전은 내 손을 떠나 문방구 주인 아저씨의 손에 머무르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옆 집 내 친구? 자판기? 아니면 아저씨가 명절 때 고향방문을 하기 위해 기차표를 사며 역무원에게로? 혹은 인생역전을 꿈꾸며 사게 되는 복권, 그 버스정류소 가판대 아저씨에게로? 그 상상의 나래는 끝을 모르는 거죠. 이런 상상을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 때 마다 가끔 하곤 했는데요, 점점 연예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한 상상은 이렇습니다. ‘아 서태지와 아이들이 사용했던 동전이 혹시 내 주머니에 잠깐 들르는 일은 없을까? 핑클이 공연 후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썼던 100원짜리를 혹시 내가 알아볼 수 있으면 기념으로 갖고 있으면서 자랑도 할 텐데.’


인연이라는 것, 저는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한 번의 연이 닿기 위해서 그 두 사람은 수 억 겁(어쩌다 한 번 지나가는 승려의 옷깃에 산길의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정도의 시간)의 세월을 거쳐야 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오늘 여기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라는 얘기도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인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뻥’ 같은데요, 라디오를 즐겨 듣는 저에게 가장 기억의 남는 이야기들 중 하나가 있습니다. 가수 김동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절친한 후배 가수 이소은이 게스트로 나와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핸드폰, 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한 IT 강국이 되기 전까지 생활 속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신혼부부가 아기들을 키우지 않는 이상은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여름 휴가 가서 해수욕장에서 찍은 사진, 계곡에서 코펠에 밥 짓는 사진, 갓난 아이가 낯선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사진, 학교에 들어간 딸이 학예회를 마친 후 엄마와 찍은 기념 사진. 여러분들의 앨범에 담긴 사진을 한 번 다시 펼쳐보세요.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들이 사진 속에 있죠. 기억하시나요? 옆에 있던 친구, 가족인가요? 아니면 모르는 사람.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남자가수 김동률은 역시나 저와 생각을 같이 하더군요. 과연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과연 나 또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 속에 담겨 어떤 이의 앨범 속에 담겨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 소소한 끈 또한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이며 자신의 흔적, 또는 사진 속 모르는 이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라고 두 DJ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명절 때 밀리는 고속도로 위,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옆 차선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아빠의 운전을 방해하며 재롱을 부리다가 저와 자꾸 눈이 마주치고, 그러다 멀어져가고..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석가탑 부지 주차장에서 옆학교 여고생 한 명의 얼굴이 익숙해질 때쯤 그 학교 버스는 먼저 떠나고..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저 사람의 필름 속에 내 얼굴이 가로 새겨진 것이고, 그렇게 짧은 인연을 마감하면서도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낍니다.


저는 이 사연을 접해 듣고 혼자 너무 공감하며 감동한 나머지 그 당시에 만나던 여자친구에게 라디오를 녹음해서 들려주며,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다’ 라며 그녀의 감성에 새겨져 있지 않던 새로운 모양의 감성을 하나 조각해놓았습니다. 이별하고 난 후 저는 혼자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몇 가지 물건들이 있었죠. 그녀가 도서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사놓았던 캔커피의 깡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갔던 노래방의 가게 명함. 어쩌면 인연이라는 것은 제게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꼭 연인 사이의 인연을 떠나서라도, 나 스스로와 내가 거친 환경들과의 인연이 저는 소중합니다. 그래서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성격인데, 청소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 가끔 대청소를 하시다가 제 인연이 담긴 물건을 한 가득 버리신 걸 알고 나면 그 어떤 무엇보다 실망을 크게 느낍니다.


어제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갔다가 술집의 좁은 화장실에서 제 지갑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네요. 그래서 지금 지갑 안에 있던 지폐 몇 장과 영수증, 명함, 카드 등을 말리려고 컴퓨터 옆에 펼쳐놓았는데, 구권 천 원 지폐 한 장이 있습니다. 교복 입은 시절 저의 그녀가 영어웅변 대회에 나간다고 하여, 저는 시나리오를 써주었고 그녀는 저의 시나리오를 갖고 전교2등을 하여 상금 3만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부탁했죠, 우리 기억에 남도록 그 상금 중 딱 천 원만 제게 달라고. 그 천원이 제 지갑에 머무른지..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났군요. 참 바보 같습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아마 제가 쓴 사보의 글들은 제 아내에게 철저히 숨겨야 할 것 같군요.

미국커플.jpg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은데, 여러분이 느끼는 인연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저처럼 뇌가 복잡하지 않은 분들이 대부분이라, 그저 같은 회사, 같은 학교, 같은 동네, 가족, 친구 이 정도를 여러분들이 가진 인연이라고 느끼실 것 같네요. 어쩌면 이런 인연 하나 하나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 쉽게 잊을 수 있는 것. 이것은 복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하나 하나에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다 집착하면 앞으로의 다가올 시간에 대처하지 못 하고 인생을 힘들게 살지 않을까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영구치가 나기 전의 치아를 뽑을 때의 아픔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면? 극기훈련 가서 벌을 받을 때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면? 남동생이나 남자친구가 훈련소에 입소한다며 빡빡 깎은 머리를 봤을 때의 슬픔을 잊지 못 한다면? 우리 조부모께서 세상을 등지셨을 때의 슬픔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내 이력서를 외면한 회사에게 느낀 서운함과 좌절감을 잊지 않는다면.. 사람은 잊을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이고, 그때 비로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되고, 그 인연 또한 언젠가는 소멸하고 또 새로운 인연이 생기고.


저는 이제 단장을 하고 집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친구의 아들이 벌써 돌잔치를 한다고 하네요. 그 아기도 엄마와 아빠가 수 억 겁의 세월을 지나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겠죠. 그 곳에 모인 친지들과 여러 친구들이 찍는 사진 속에 어쩌면 제 뒷모습 일부가 들어갈 수 있겠죠. 그렇게 저는 누군가의 앨범 한 켠을 차지 하게 되고, 그 아무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연이라는 모레알갱이 같은 가치가 앨범 속의 먼지와 함께 머무를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어, 청혼을 하게 되면 말을 하겠죠.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와 나의 결혼’이라는 숙제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향(香) 에세이] 오감의 무질서, 그리고 무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