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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Apr 07. 2023

종교가 누린 면세 특권

국가는 기독교인에게 세금을 두 배 더 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교 재산을 몰수하고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이 가능할까?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는 과거에 종종 일어났던 일이었다. 힘없는 이웃 나라에서 조공을 받듯이 국가는 힘없는 사람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 


집권세력이 종교, 언어, 민족이 다른 사람에게서 세금을 더 징수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다. 특히 종교적 관용이 없던 시절 다른 종교를 차별하여 과세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공인 종교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고대 이집트 사원은 왕에 필적할 만한 부를 소유했다. 사원은 전체 토지의 1/3을 소유했고 조세가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 사원에 속한 농부는 왕에게 내는 인두세, 추수세를 면제받았지만 똑같은 금액을 사원에 납부해야 했다. 이집트의 농부들은 사원 또는 왕의 과도한 납세 요구로 고달픈 삶을 살았다.


사원은 면세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원의 토지 및 건물은 정부의 박해, 특히 세리의 폭력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사원의 면세 특권은 폐지했으나 도피처 제도는 폐지하지 않았다. 이는 삼한시대 도망자를 잡아내지 못했다는 소도(蘇塗)와 유사한 개념으로 국제사회에서 관례화된 망명자 보호 제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와 불교는 초기 변방 종교에서 시작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늘어 기원후 250년 신도가 백만 명을 넘어서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인 40명 중 1명에 해당하는 기독교인은 황제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기독교는 로마의 빈약한 재정을 십일조로 나누어 가졌으며 왕이 사후에 신이 된다는 믿음을 배척하여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로마는 기독교인들이 유일신을 섬기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당시 보편적인 로마의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갈등이 커졌다.


기원후 250년 데키우스(Decius)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황제는 257년 기독교인을 대량 학살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식민지 이집트에서도 이루어졌다. 로마는 기독교인에게 로마의 신에게 재물을 바치도록 강요하고 이를 입증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배교(背敎)하거나 죽을 때까지 고문당했다. 


고문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가혹했다. 눈이나 내장 제거하기, 화형, 온몸 갈기갈기 찢기, 산채로 튀기기와 같은 잔인한 방법이 동원됐다. 부자는 재난을 모면할 여지가 있었다. 뇌물을 주고 자신의 노예를 대신 보내 재 물을 바치도록 하거나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로마 황제는 주기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하지만 예수처럼 희생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310년 기독교인 숫자가 천만 명이 되면서 로마제국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는 기독교를 억누르는 대신 타협을 선택했다. 그는 많은 자산을 교회로 이전하고 교회에 면세 특권을 부여했으며 교회의 계급제도를 인정했다. 교회도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이교 사원의 금을 모두 몰수했다. 개종으로 금이라는 엄청난 부수입이 생긴 것이다. 몰수된 금은 금화로 제작하여 유통했고 세금도 금화로 납부하도록 했다. 금은 이후 로마 재정의 기본 단위가 되었고 로마는 금본위제 국가가 됐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됐다. 일부 귀족은 교회의 지도자가 됐으며 국가와 교회는 이교 사원을 경쟁적으로 약탈했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의 약탈과 재분배가 일어났다. 기독교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

중국에서 불교도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기원후 400년경 불교도는 백만 명에 불과했으나 기원후 500년경 신자가 천만에 이르자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결정을 내린다. 황제는 불교에 토지 재산을 아낌없이 증여하고 조세를 면제했으며 불교 지도자를 명예롭게 했다. 


남북조 시대 양 무제(梁武帝)는 불교 행사를 지원하고, 동물 희생을 금지했으며 경전을 수집하기 위해 인도로 사절을 파견했다. 불교는 양무제를 백성을 구원하는 보살로 인정하여 화답했다. 북위 황제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얻었다. 북위 황제는 최고 승려의 임명권을 얻었고 최고 승려는 황제를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부러워했을 특혜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라는 불교를 위험한 사상으로 보았다. 유교는 가부장제의 정점에 황제를 두고 있으나 불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 사원과 승려는 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금도 납부하지 않았다. 불교가 인도에서 넘어온 외래 종교라는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 무종은 845년 4,600개의 사찰과 40,000개의 암자를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금, 은, 동으로 만들어진 불상 및 장식품은 녹여서 유통했다. 승려 25만 명에게는 납세의무가 부과됐고 승려들은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농부, 기술자, 상인, 투자자 및 고리 대부업 자로 일했다. 당 무종은 압수한 불교 재산으로 위구르족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재정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때때로 대립하면서 때때로 협력한 국가와 종교는 세금(돈) 문제로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다. 국가는 교회를 면세했지만 교회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와 재산에서 세 금을 거두었다. 수도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했으며 지방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종교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수도원은 술을 만들어 판매했다. 수도원에서 만든 술은 면세 혜택을 받아 경쟁력이 있었다. 지금도 유럽에서 수도원 맥주가 최고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맛을 내는 이유이다.


중세 성직자는 높은 지위를 누리었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왕과 영주에 버금가는 이들의 권력은 조세 징수권에 기초하고 있었다. 사제는 도로 및 다리에서 통행세가 면제됐다. 영국 상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북유럽을 여행할 때 종교적 목적의 순교자 또는 성직자로 행세했다. 종교 면세는 가짜 성직자를 많이 만들었으며 탈세 상인을 성스러운 신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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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년 이전까지 봉건 영주는 자기 부하를 주교로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영주 자신이 임명한 가신을 통해 교회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교황 그레고리 7세는 1075년 독일 내 모든 주교의 임명권을 주장했다. 그러면 교황의 재정을 강화할 수 있다. 이에 놀란 독일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신의 은총으로 다른 모든 주교와 함께 내려오라고 했다. 하지만 교황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 황제를 파문하고 그를 기독교계에서 추방했다.


독일 제후들은 황제의 편이 아니었다.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황제를 뽑으려 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수행원을 데리고 카노사(Canossa)로 향했다. 그는 참회자의 옷을 입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문 밖에서 3일을 기다리며 선처를 구했다. 이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이다. 하인리히 4세는 눈 속에서 맨발로 3일간 무릎 꿇고 빌어서 용서를 받았지만 곧바로 교황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사망했다. 교황은 자기가 고용한 용병의 급료를 지급하지 못해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서임권 투쟁(Investiture Controversy, 1075~1122)이다.


한편 프랑스 필립 4세는 교회의 면세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교회 자산의 과세에 눈을 돌렸지만 교황은 파문으로 대항했다. 필립 4세는 성가신 교황 보니파시오(Bonifatius) 8세를 납치해 프랑스에 가두고 자신에게 협력하도록 했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 약 200년 후에 일어난 ‘아비뇽 유수’이다. 교황의 유수 이후 몇 명의 추기경들은 로마로 돌아가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다. 이후 50년 동안 아비뇽과 로마 교황은 자신이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라고 건건이 대립했고 보호자에 의존하는 교황의 권위는 위축됐다. 교황은 재정수입을 왕과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재원을 만들기 위해 성직 판매, 면죄부 판매를 시작했다. 교회 상업화의 시작이다.


중세 이후 국왕은 교회와의 투쟁에서 조금씩 승리를 쟁취했다. 왕은 자신의 영토에서 세금을 부과했고 사람들이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왕은 13세기에 교회의 토지를 임차한 사람에게도 과세했으며 14세기에는 교회 재산의 1/10에 대해 정기적으로 과세했다. 영국 에드워드 1세는 사전 통보 없이 수도원 재산을 이탈리아 금융가에게 담보로 제공하기도 했다.


왕과 교회는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12세기 후반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성직자의 수입에 과세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후 성직자 과세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은 교황을 지지했지만 정기 또는 수시로 교회의 재산에서 세금을 징수했고 전시에는 추가지원을 요구했다. 14세기 아비뇽의 교황은 프랑스 필립 6세에게 노골적인 선물을 했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1년 전비인 백만 플로린(florin)을 필립 6세에게 빌려준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면세 특권을 폐지했다.




참고문헌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Ancient Egypt, page 13-15,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Ancient Egypt, page 21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The empire in tax bondage, page 90-91

Why the West Rules – for Now (Ian Morris, First Picador Edition, 2011), Decline and Fall, page 328- 329, The Eastern Age page 375-376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Medieval Taxation, page 147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The Ancient Regime, page 218,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The Ancient Regime, page 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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