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숭배자와 돼지혐오자
각 민족이나 문화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동물에 대하여 한쪽에서는 혐오하는 동물이고 다른 쪽에서는 숭배하는 동물이라는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선 돼지혐오자의 문화에 대하여 먼저 그 기원을 추적한다.
3대 계시종교로 알려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도 모두 현실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돼지라는 동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는 구약성경(창세기와 레위기)에서 히브리인의 신이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거나 손을 되면 부정을 탄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음식 규례에는 '되새김질‘ 하지 않는 동물'을 제물이나 식용으로 사용하지 말 것이 신의 명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드 역시 알라 신이 돼지에 대하여 불결하다고 자신에게 계시했다고 코란에 적혀있다. 이런 종교적 이유로 돼지는 다른 동물보다 효과적으로 알곡이나 쭉정이를 고농도지방과 고단백질로 바꾸는 동물이지만 수백만의 유대인과 수억의 이슬람교도들은 아직도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여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돼지라는 동물에 대한 금기를 영적인 상징으로 해석했는데, 되새김질하는 동물의 의미를 하나임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마음에 깊이 되새겨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실질적으로 돼지를 사육하고 도축하고 식용으로 혹은 가공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북반부의 반대편에 있는 남반부 뉴기니와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군도에서는 돼지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조상들에게 바치고 결혼이나 축제와 같은 행사 때 잡아먹는다. 이는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인들은 오리나 돼지를 더 많이 식용으로 사육하고 식품으로 만들어 요리한다.
실제로 돼지가 다른 가축보다 더 불결하고 더러운 동물이 아니라는 것은 축산업자라면 누구나 금방 알수 있다. 좁은 우리에 갇힌 소도 자기 배설물과 오물 속에서 뒹군다. 배고픈 소는 사람의 배설물도 맛있게 먹는다. 개나 닭도 그렇게 하지만 이에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모순을 발견한 사람은 르네상스초기의 유대교 랍비였다고 한다. 12세기 이집트 카이로에 살던 살라딘의 주치의였던 마이모니데스는 돼지고기 금기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신이 공공 위생 수단으로 돼지고기 금기를 선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설명은 의학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비록 날것으로 먹으면 선모충병이 생기지만, 충분히 익히거나 구워서 먹으면 그것을 방지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자들, 특히 [황금가지]란 민속학적 명서를 쓴 프레이저도 돼지의 금기에 대하여 그것이 다른 동물처럼 원래 신성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그 이유의 근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대로라면 유대인들이 시나이산에서 황금 송아지를 숭배했기에 돼지보다 소가 더 불결한 동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저자가 제시하는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무엇일까? 마빈 해리스는 <자연공동체와 문화공동체의 갈등과 조화>란 관점에서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돼지사육이 중동의 기본적인 문화와 자연생태계의 조화된 통합성을 깨트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성서와 코란에서는 돼지를 정죄했다고 본다.
그 당시의 물이 부족한 평원과 구릉 지역을 유목하던 반정착적 농경부족에게 돼지는 재산의 가치가 아니라 공중위생에 아주 위험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물이 부족한 유목상황에서 풀과 적은 물로만으로 생존이 가능한 소와 양과 염소와 같은 반추동물이 가축으로 기르기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돼지는 신체구조상 네게브나 요르단 계곡 등 성서와 코란에 나오는 여러 지방의 덥고 건조한 기후를 잘 견디지 못한다. 다른 가축과 비교해서 돼지는 체온조절 능력을 몸속에 잘 갖추고 있지 못한다. 무더위에 폐사하는 돼지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종교적으로 식용으로 인정된 모든 음식물에 대한 관행에 생태학적 근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