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북풍이 지나가고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정원 위로 이른 봄의 따사로운 햇빛이 다시 나타나 때 늦은 폭설로 잠시 움 추렸던 초목들의 등을 토닥거린다. 화분에 심긴 철쭉 묘목을 위시하여 더 낯선 야생화 군단이 가까운 로칼 푸드에 준비된 지역 농부들이 재배한 상업적인 진열대에 올라오면 정원을 꾸미는 자들은 다시 분주해진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냉정하지만 한편으로 도덕적이다. 그렇게 해서 시장 안에는 고루고루 균등한 분배와 혜택이 이루어진단다. 정원사들이 직접 생산과 분배에 속속들이 관여하려면 너무 힘들다. 만약 정원에 보이지 않는 정원의 손이 있다면 사실 정원사의 인위적 계산도 필요 없다.
우리 정원이나 화단에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다시 더 엄숙한 순종과 복종이 인위적인 건물 아래 적용된다. 마치 남편들이 가끔 강압적이라면 남편이라는 이유로 부인과 그 모든 주위가 참아야만 하듯이. 그래서 아마 게르만어로 정원은 여성형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원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토질의 형태와 태양의 주기 그리고 계절의 원리가 존재한다.
처음에 내가 원했던 것은 일본식 정원에 따라 흰모래를 깔고 그 위에 몇 그루의 붉은 꽃나무와 바위들로 단순화하려 했다. 희고 붉으면 됐지 그 이상의 더 이상 무엇을 필요로 할까? 사랑의 색은 희게 시작하여 붉음으로 완성된다.
데크와 정원의 경계에 홍매를 심은 것은 나만의 감성적 지향의 궁극을 증명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보편적 감성의 색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도발적 붉음은 특정 개체의 생존 전략이었다. 예를 들어 도드라진 잔당화의 진홍 빛깔은 다른 꽃보다 더 많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봄을 기다리는 것은 벌보다 나비를 보고 싶었다. 이파리 사이에서 천적을 피해 기어 다니던 배추벌레의 초라한 몸짓에서 희고 노란 날개로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생명체의 비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비는 제비와 마찬가지로 기다릴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정원의 남쪽에는 매년 푸성귀를 심었다. 먹기 위함이지만 내심 나비를 다시 보기 위함도 있었다. 희거나 노란 것은 배추 나비의 특성이고 호랑나비는 어떤 나비가 유전적으로 변형되었는지 모른다. 우리 인생에 나비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드론만 날아다닌다.
사실 정원을 가꾸어보니 정원사의 마음 혹은 계획은 필요 없고 정원의 흐름에 따른 아니 종속된 의지만 필요하다. 이 문장을 보는 중세의 수도사의 마음을 가진 정원사는 또 이렇게 질책할 것이다. 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아라고.
정원에는 관찰자의 마음이 필요 없다. 흰나비가 조용히 날아다니면 흰나비를 따라서 흰나비의 시각으로 정원에 핀 꽃들에 내려 않아 느끼는 촉감 그리고 한편으로 그 위험들 아니면 꿀을 빠는 즐거움 이상의, 꿀을 먹고 날라 가는 나비들이 그리는 공간 춤의 미학적 완성, 최종적으로 신학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들.
왜 신학적 미학이란 명칭이 나왔을까? 정원의 아름다움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다양한 향이 성경이나 그 밖의 종교적 경전에 비유로 표시되었다고 해도 인간의 후각이 느끼는 박하 향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혹은 잠드는 것을 보고 박하와 라벤더 향을 느낀다. 아이는 나에게 박하이고 라벤더이다. 그리고 내 뇌를 흔드는 박하향이고 내 폐에 깊숙이 스며는 라벤더 향이다. 신은 나의 라벤더로 잠들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박하로 깨어날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종종 나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에 이상하고 기이한 그래서 결국에는 자격 없는 물음으로 드러나는 비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정원은 정원사의 자격을 묻지 않는다. 그 공간이 주어지고 그것들이 옮겨진 데로 조성되고 반발하고 순응해갈뿐이다. 마치 수도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