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수목원에 비해 모든 정원은 초라하다. 정원은 주인의 재력이나 관심이나 위치에 따라 규모가 다르고 품종의 배열이 다르다. 만약 나의 정원을 비교한다면 곧 절망이다. 큰 아파트 실내 정원과 비교할 정도이고, 같은 동네 내의 넓은 정원, 특히 다양한 품종을 자랑하는 정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 아이는 키가 작다. 처가 쪽을 닮은 모양이다. 어느 날 공중파를 비롯한 다양한 채널에서 외모 지상주의적 걸 그룹의 전성시대가 열리니, 아이나 우리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1960년대 3M 중 마르쿠제의 예상, 에로스와 문명의 분석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곳이 한국이다.
그럼에도 잔당화를 비롯한 도발적인 꽃들을 정원에 심는 것은 어떻게 합리화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정원 안에 개나리나 진달래 그리고 냉이를 심지 못할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개나리고 진달래이고 냉이가 아닌가?
미학적인, 아니 탐미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존 문학이나 정원의 형식에 중독된 사람들의 시대적 사명일지도 모른다. 미스 코리아적 정원, 아님 소쇄원적 정원이 머리에 기준이 되어있으면 누가 자기 정원에 만족을 느낄까?
더프리스가 발견한 돌연변이가 달맞이꽃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은 영어권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우리 인류에게 미친 빛이고 나아가서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왜 비정상을 정상화하기 위해 달이 떠야 하는가? 그리고 이 달을 맞이하러 왜 이 미친 꽃이 생물사에 등장해야 하는가?
광기와 정상 혹은 불륜과 도덕, 이것의 기준을 모세 이후로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융은 이분법을 싫어한다는 명분으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자기 이론을 전개했다. 마치 나의 정원이 색조나 원리적으로 약간 단조롭다고 다음에 이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다른 식의 배열을 한 것과 같다.
모세는 통일성을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도. 하지만 구약의 묵시적 선지자나 예수까지도 이런 일관성을 좋아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스스로 일탈하였지만 그 안에서 벗어남으로 새 언약의 길을 갔다.
마오쩌둥이 비난받으면서도 살아남는 이유는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신적이라고 부른 인간은 희랍이나 특히 유대에서 부르는 신과 다르다. 중국에서 신은 그냥 우리와 같은 속성이면서 우리 이상이라는 단순한 의미이다.
실내의 꽃들은 나를 좋아하고 정원의 초목들은 나를 반긴다. 그 안에 있는 동물들은 아내와 교통 한다. 무엇이 정상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실내외의 초목과 집 안팎의 동물들을 통일할 이유도 까닭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가끔 자연의 정령이 바람으로 변해서 이층 다락방 지붕을 흔들면 내가 괴로워서라도 ‘정령들이여! 신에게 복속하소서!’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존재자의 구석에 그들의 고난이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끝남의 주보다 고난의 주를 아직 사랑하는지 모른다.
현관 입구 몇 토막 날라 간 나무 펜스를 특별히 나를 사랑하는 형제가 와서 힘들게 고쳐주고 갔다. 만약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했으면 들어줄 리 만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원의 정령들은 자주 오면 나의 나약함을 강화하는 것이고, 오히려 정원의 허문 담을 고쳐주는 인간 이웃들은 지친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한다.
그는 곧 가고 다시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쥐들이 다락 지붕 위를 들락거리고 야생을 잃어버린 고양이들은 집안에서 혹은 집 밖에서 자신들 사회에서의 위계질서만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꽃들은 아니 풀들은, 내가 기억하고 또 알아내려 했던 수많은 야생초들은...
인간을 제외한 유기체 그 누구도 70억 인구 중 한 인간의 두뇌에서 벌어지는 전기 폭풍에 영향받는 개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신이 고민한다고 해서 함께 고민하는 침팬지는 없다. 적어도 우리 고양이도 마찬가지로 나의 고민에 냉정하다.
그래서 자신의 고민을 함께 하고 분노를 함께 하는 존재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힘이 곧 신이다. 내가 신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신은 감정적이다. 호모 데우스, 엄청 똑똑한 인간이 곧 인류가 신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반대이다.
데우스 호모 헨 판타 파토스. 하나님과 사람은 감성적으로 하나이다. 나의 헬라어는 엉터리일 것이다. 하지만 문법적 의미 이전의 의미는 마르틴 부버가 말하듯이 근원-명제. 혹 짝-언어 안에서 드러난다. 신의 감성에 자신의 감성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그의 감성을 우리의 감성으로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의 감성으로 우리의 감성을 몰입한다.
사랑은 사실 이런 것이다. 연인이나 부모와 자식 혹은 심지어 우정까지라도. 왜냐하면 한 신이 자신의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과학적 진화론을 이해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기원설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을 빼더라도 생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왜? 나와 당신의 공통된 요소가 그 안에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