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16

기다림

by 박종규


풀도 나무도 가끔 아니 자주 아프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지. 자연도 인간 이상으로 늘 아프다. 아픔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표식이라는 것은 허풍이다. 삶은 환희이자 쾌락이다. 잠시 겪는 고통은 기쁨을 배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픔은 생명체의 현 상황이다.


어린 잔디는 빛이 강하거나 약해서 아픔을 겪고, 갓 심긴 화초들은 물이 부족하거나 많아서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대부분은 생존에서 탈락한다.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나 증권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투자가들은 몇 프로의 생존 가능성을 보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일종의 선지자이다. 하지만 생명 종의 대부분의 멸종의 길을 갔듯이 종교 던 이념이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몰락과 상실의 길을 갔다. 그러나 그들이 헛수고한 것일까? 내가 관리하던 정원이 잡초로 무성한 초지가 된다면 나의 삶은?


정원의 서쪽 돌담 틈에 심은 철쭉들 중 반만 살아남았고, 향방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심은 장미 대다수는 말라죽었다. 하지만 남천과 조릿대는 대부분 살아서 싱싱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나고 있으며. 그렇게 강한 은행은 생각보다 느리게 성장하고 있다.


정원 내에 존재하는 것들은 지루함이 없다. 그들의 아픔은 지루함에 기인한 아픔이 아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아픔은 대부분 생존의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초목들이 보기엔 정말 배부른, 요즘 말로 배부른 지루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불행과 우리의 불행은 다르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히 방 안에 머무르기 못하는 탓에 생겨난다. 인간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열정(걱정)이나 분주함(사건) 혹은 산만함(오락)이나 열심히 노력함(열중함)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아픔의 철학자 플뤼게가 인용한 파스칼의 이 단편적인 글의 제목은 곧 –지루함-이다. 동물은 지루함을 모른다. 하지만 정원사는 지루하다. 그의 고유한 아픔은 정원 내 아님 집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아픔을 치료할 때는 느낄 수 없는 아픔이다.


신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아담의 저주는 곧 지루함이다. 지루함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곧 불안이고, 지속되는 불안은 곧 닥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원사의 미덕은 정원을 돌보는 것이고 정원을 관찰하는 것이다. 사실 겨울은 정원사에게는 일종의 안식이 아니라 점진적인 불행의 시작이다. 초봄까지 정원사는 내적인 아픔에 시달려야 한다. 그는 지루함에 뭔가 저질러야만 하는 충동에 시달린다.


그러나 자연은 다행스럽게 그의 지루함이 죽음의 충동으로 치닫기 전에 다시 신의 일에 동참할 길을 열어준다. 자연의 정령들이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꽃이 피기 전에 거센 동풍과 함께 일을 시작하면 정원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따라 정원 일을 시작한다.


냉이가 먼저 자라났고 이어서 그 흔한 야생초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면 서서히 정원 내에 봄의 전령인 꽃나무의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산유화의 노랑물은 이미 작은 꽃망울 틈으로 올라왔다. 곧 분홍 물들이 진달래와 철쭉의 꽃잎들을 물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기다리자. 삶의 본질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어떤 설렘이다. 불안은 지루함에서 비롯하지만 행복은 설렘에서 시작된다. 정원사는 기다리는 자이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는 정원사만이 정원을 가꿀 수 있다. 살구꽃이 언제 필지 모르지만 곧 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