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15

정원사

by 박종규


정원에 겨울이 가기 전 봄이 오기 전 이른 비도 오고 때론 서리도 다시 끼지만 이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의 계기(繼起)는 적막(寂寞)이다. 고요하고 쓸쓸함은 자연의 특유한 속성이지만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언어이던 사고가 있기에 그 속성을 지우려고 한다.


동양의 선사(禪師)들이나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이 엄숙한 자연의 깊은 속살을 만진 사람이다. 작은 자연인 아니 자연의 작은 모방인 정원에도 이런 원초적 적막이 가끔 존재한다. 이른 비가 느긋한 잔디와 하염없는 단풍 및 은행나무 그리고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벚나무나 매화나무에 속절없이 내려도 정원 자체는 적막하다.


미세한 소음을 내는 박새 하나 날아들지 않는 초봄의 정원, 가끔 윗집 농사 반 운전 반 아저씨의 경운기 소리 말고는 아침을 건드리지 않는 정원, 풀들이 온 힘을 다해 수분을 흡수해도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음의 광장인 정원, 이것이 인간이 없던 자연이다.


내가 없으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아마 70억 인류 중 남녀 사이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없어도 당신은 잘 살아. 아니 나 없이도 당신은 잘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원래 내가 당신 옆에 없었는데. 만약 구글에서 이런 단어를 검색한다면, 인간의 현실을 더 잘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풍나무의 열매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이상하게 봄이 되면 이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 아이의 옆구리에도 날개가 있을까? 아님 나의 선녀인 아내의 겨드랑이에도 내가 언젠가 사라지면 천상으로 올라갈 날개가 있을까? 선녀는 선녀를 낳으니..


나는 나의 정원에서 가을날까지 기다려서 정면의 은행나무에서 흩뿌리는 은행 이파리의 바래가는 진 노랑 빛을 좋아하지만, 아내와 딸은 베란다 앞 왕 벚꽃의 중복된 분홍빛의 찬란함과 홀 벚꽃의 희고도 붉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꽃잎은 흩어져도 울지 않는다. 나무는 잘라져도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기계와 둔탁한 물체의 상호 반향이다. 나무의 속마음은 기계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꽃잎의 연약한 정서는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시인의 시정(詩情)에만 전해진다. 나무 아래 개미는 무심히 자기의 길을 간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여호와도 울고 선지자도 울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결과를 보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이다. 정원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니 차라리 우주를 창조하고 정원을 창조한 정원사라 하더라도 정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제일성(齊一性). 모든 신이 빠지는 우물이다. 모든 정원사가 넘어지는 언덕이다. 호킹이 죽기 전에 예레미야서를 읽었다면 웃으면서 죽었을 것인데....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아니다. 최소한 제2 이사야서를 읽어야만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몇 번의 겨울을 겪은 정원사는 쉽게 봄을 맞을 수 없다. 사랑의 실패를 연이어 경험한 여인들이 곧 결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뭔가 흐른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무엇이 동질적인 것으로 흐르고, 여러 가지인 무엇이 하나인 것으로 흐르고, 각자 길을 가던 개체들이 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정원사의 삶은 정원사인 한에 있어서 정원에 모든 시선과 목적이 맞춰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목전에 둔 젊은 청춘과도 같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히 결합과 탄생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지만 정원은 좀 더 각성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각성될까? 꽃 앞에서 풀 앞에서 나비 앞에서. 함몰되기만을 바라는 자연과 정원의 정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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