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14

고양이

by 박종규


고양이들, 강하고 때론 연약한 피조물들이 정원의 한쪽에 존재한다. 한 놈은 희고 검고 다른 두 놈은 누렇고 희다. 정원의 색상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정원의 색감에 동화되려고 그런 무늬를 만들어 낸지는 모른다.


고양이들은 음식의 찌꺼기를 기대하며 늘 정원의 한 편에서 서성거린다. 그들의 눈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잔디의 눈(싹)은 다소곳하다. 단풍나무의 눈(싹)은 조금 더 직접적이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은 너무나 매력적인 여인의 유혹과도 같다.


집 안에 이미 두 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다. 아비시니언과 스코티시 스트레이트라는 아주 멋지게 인간화된, 인공화 된 동물이다. 하지만 정원에는 자신들의 법칙에 맞게 적응한 고양이 떼들이 어슬렁거리고 또 우리의 심성을 자극하고 또 감각을 유혹한다.


잔설이 남아있는 단풍나무 사이로 가끔 비치는 야생 고양이들의 차진 털빛은 그 나무가 보이는 창밖으로 멍하게 바라보는 집 고양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모든 빛은 색을 위한 것이고 특별히 유기체의 현란한 색은 이성을 위한 유혹이다.


정원에는 안식과 유혹이라는 두 가지 색이 공존한다. 잔디를 까는 이유는 대부분 안식과 평안을 위함이다. 푸른 초장 위에서 우리는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장미와 벚꽃 그리고 그 밖의 도발적인 꽃나무를 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양이는 유혹적이지만 안식을 주지 못하고 강아지는 안식을 주지만 도발적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정원이 있는 집에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함께 거주한다. 그리고 밖에도 야생 고양이와 인접한 집의 진돗개가 공존한다. 마치 이 세상처럼.


나의 삶이 얼마나 정원 안에서 지속될지 두렵다. 정원은 안식이지만 제한이다. 나는 이 제한을 넘고 싶다. 하지만 두렵다. 아담은 동산이라는 제한이 싫어서 선악과를 먹었을 것이다. 결과는 자유와 공포였다. 자유의 대가는 불안과 공포이다. 하지만 제한 속의 소심한 평화보다 그런 자유가 더 낮지 않을까?


누구다 답할 수 없는 물음이 고양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집 밖 고양이와 집 안 고양이를 동시에 바라보는 행운은 혹은 불행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순의 현실은 괴로운 것이지만 선지자의 운명을 택한 시인에게는 창작의 근원이기도 하다. 오늘 또 정원에서의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