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흙은 부드럽고 만지면 간지럽고 때론 경작하기 귀찮고 하지만 결국엔 늘 정겹다. 봄이 오면 정원사는 먼저 흙에게 그리고 대지의 신에게 경배를 해야만 한다. 흙은 거부할 수 없는 게 식목이나 꽃들이 심기어지는 것이지만 사실 흙 고유의 미묘한 의지와 힘을 아는 정원사는 잘 없다.
비가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생각한 정원사에게 드디어 하늘은 비를 내려주었다. 내게 임한 실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지고 해석될 것이다. 비는 폭우이지만 오랜 가뭄 끝에 이 비는 단비이다. 폭우를 동반하는 바람은 마치 폭풍과 같다. 그러나 결과는 화초를 자라게 주고 정원사의 잠든 혼을 깨우는 바람이었다.
천지와 연관된 삶은 이러하다. 삶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천지는 지평이다. 중국적 사유의 핵심은 존재의 지평 속에 음과 양의 대립과 조화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희랍적 사유의 핵심은 무지이다. 항상 모든 핵심은 무지로 존재하기에 모든 지식이 오기 전에는 근대의 철학자 로크가 말한 것처럼 일종의 백지상태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 즉 무지의 자각이 지혜의 출발이다. 그러나 공자는 반대로 태어나자 뭔가 아는 사람도 있고 또 배우면 즉각 아는 사람도 서서히 아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층 다락방에 누워서, 아플 때나 덜 아플 때나 창밖을 보면 겨울 내내 바삭 말랐던 감나무 몇 줄기에서 초록 잎이 솟아나 푸른 하늘을 수놓는 것을 본다. 봄이 지나갈 때쯤 감나무와 은행나무 가지의 순들이 솟아난다.
청 단풍은 이미 푸른 이파리들을 자랑하고 적 단풍은 이제 순을 낸다. 나는 적 단풍처럼 아니 감나무처럼 매사 느렸다. 인생을 깨닫는데 특별히 무척 느렸다. 삶은 순리대로 되는 것만도 아니고 노력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나무에 많은 물과 거름을 줘도 때로는 죽어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않은 정원의 구석에서 죽은 줄로 알았던 꽃들이 봄에 다시 피어난다. 노력과 의지와 다르게 자연의 선물로 피어난 그 꽃들이 때론 더 사랑스럽다.
자연은 예상할 수 있는 거대한 우주이지만 한편으로 정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발생이다. 당신이 만약 진해의 벚꽃 군항제에 가서 라일락꽃을 사랑하게 될 줄은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봄의 북풍이 불고 봄을 거두어야만 하는 요즘 이상하게 이층 다락방에서 자는 나의 몸을 깨우는 것은 북쪽 현관에 작게 자라나고 피어난 보랏빛 라일락의 새벽 향이다. 옆에 심은 백화등의 지속적인 피어남을 기대하였지만 라일락의 향은 항상 먼저 피어나 나의 폐부로 즉시 침투하였다.
남쪽 정원에 심긴 벚꽃과 왕 벚꽃은 교대로 봄을 채워주었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그것으로 위로해주지 못한 삶에 올해는 미안함을 느꼈다. 이것이 자연의 정령과 인간 혼의 교감이었다. 아직 정원의 왕 벚꽃은 화려하다. 그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무엇이 영원한가? 일시적이나마 화려하게 피어난 꽃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현상적 모든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사실 하루만 산다면 오늘 피어난 꽃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어떤 꽃이라도 그 자체는 아름답다. 피는 꽃은 피는 대로 아름답고, 지는 꽃은 지는 대로. 삶이 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라는 감정도, 사건도, 심지어 불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