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
정원으로 들어오는 나무 대문 위에 빨간 우체통의 모습인 편지함을 달아놓았다. 한 달에 한두 번 들어오는 별장이기 때문에 몇 해 동안에는 인근의 산에 사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알을 까기 시작했다. 정원에 날라 오는 새의 생명은 이 둥지로부터 시작하였다.
둥지란 얼마나 아늑한 개념인가? 새들의 생은 둥지로부터 시작한다.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키우고 독립시키고. 정원의 크고 작은 나무에 새들은 둥지를 틀지 못했다. 유일한 둥지는 우편함처럼 만든 빨간 통이었다.
빨간 통, 빨간 우편함, 빨간 우체통, 빨간 박스, 오래되면 핑크도 아니고 주황도 아니게 변색될 곧 쓸모없는 나무통. 박새나 혹은 그 종류의 작은 새들은 몇 년 간 야생 고양이들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둥지를 틀고 알을 깠다.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물리적 혹은 사회적 공간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둥지를 트는 사람이다. 시는 그가 튼 둥지에 날라 온 영감과 그의 뼈와 골이 합작한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 지저귀는 아기 새들의 작은 소음은 노래의 전조라고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인 사용가치이고 무엇이 교환가치이며, 결국엔 무엇이 절대가치인가? 내게 절대적인 것은 무엇이며,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원사는 정원 안에서 이 모든 가치의 교환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이다.
시장은 밖에 존재하고 사랑은 안에 존재한다. 사랑은 시장을 넘고, 교환을 넘고, 역사를 넘어 결국엔 진실에만 도달할 것이다. 적어도 인간 감정의 진실. 감각 중추는 정확하다. 수 만년의 진화를 거쳤기 때문에 화성에 보낸 로켓 궤도처럼 정확하다.
화단에 심은 꽃이 피어날까, 혹 피어나지 않을까 꽃 자체로 망설이는 것은 아니다. 망설일 자유가 꽃의 생명 안에는 조금은 주어졌겠지만 꽃은 어디에서든 펴야 하고 사람은 어떻게 서든 진실한 사랑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이 꽃과 인간의 현실이다.
화단에 심은 다양한 꽃들은 때론 죽을 수도, 마를 수도 혹은 정원사의 마음에 안 맞으면 종을 바꿔 심을 수도 있다. 레몬 타임은 나의 기대와 달리 많은 뿌리가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화초 과의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왕 벚꽃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려고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었고 그리고 분홍빛 꽃잎 길을 오랫동안 정원에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나의 정성과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아니 최소한 나에게만은 인생의 절정의 길을 만들어주었다. 정원사에게 정원의 꽃나무는 그러면 되었지 아니한가?
빨간 우체통에서 태어난 작은 새들이 아침이면 지저귀며 여기저기에 앉아있다. 새소리 없는 정원은 없다. 어느 정원에도 새는 날아든다. 새소리가 없는 지구는 차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 아니면 메마른 사막밖에 없을 것이다.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더불어 간간이 들리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가끔 듣는 이웃집의 오래된 팝송의 음률이 어우러져 나의 온갖 뇌 세포를 재생시킨다. 소리는 꽃향기 이상일 때가 있다. 특히 나의 작은 정원에 울리는 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