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23

상사초

by 박종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씨는 열매로 가고 열매는 많거나 적거나 일단 열리는 것이 그 속성이다. 정원사의 관심과 별도로 초목들 자체는 그 자체로 절실하다. 뭔가 지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절박함이 정원의 초목들에는 존재한다. 생명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투쟁이다.


꽃이 피면 기를 쓰고 나비가 날아오고, 나비가 없어도 꽃은 핀다. 인위적으로 꽃을 피우고 나비를 키워도 원하는 데로 정확하게 1:1의 수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손을 떼면 오히려 꽃은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풀은 번식한다. 정원사는 단지 관리자이다. 잘못하면 그는 생명의 반항을 얻는다. 생명은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비약이 합리화되고 초월이 보편화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의 원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세포는 복잡하지만 전체를 움직이는 생명의 프로그램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자연스러운 사랑을 한다면 아주 단순한 생체 호르몬의 법칙에 따라야만 한다. 그래야 사랑이 이루어진다. 대부분 사랑이 깨어지는 이유는 쓸모없는 계산과 배려의 연산 때문이다.


정원 밖에서 또 다른 생명의 현상을 만나는 경험은 아주 놀랍고도 경이롭다. 특별히 야생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는 것들은 더욱더 신비롭다. 집 뒤에는 낮은 산들이 구렁지어 있다. 그 사이로 솔밭길이 있고 그 길을 걸을 때 마주치는 생명체들은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정원의 상사초가 예상외로 갑자기 피어나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환상적인 체험은 뒷산의 등산로에서 자라나고 사라지는 이름 모를 야생 버섯 무리의 모습을 마주칠 때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에 대해서는 독을 품고 있을 야생 버섯은 군락으로 피어날수록 꽃밭 이상, 아니 꿈에나 볼 수 있는 구름과 같은 몽환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삶의 반은 꿈이고, 꿈의 대부분은 구름 혹은 꽃과 버섯 혹은 낭떠러지와 심연과 같은 이미지이다. 누군가 당신을 공격하거나 보호하거나 그런 이미지에 땀을 흘리거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우리 삶의 반이다.


상사초의 피어남과 짐을 상세하게 묘사하거나 상징화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악초이던 약초이던 자그마한 버섯들이 자라나고 곧 소멸하는 숲을 상상해보자.


적어도 나에겐 이런 상상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버섯들은 특별한 독초를 제외하곤 희거나 회색이거나 중간적인 겸손한 색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색 속에 인생의 안정이 있다. 누군들 잘나고 싶지 않을까? 작고 하얀 혹은 회색과 잿빛 버섯들이 피어나는 산길을 걸으며 나는 내게 남겨진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을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