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25

은엽 아지랑이

by 박종규


정원의 절반을 채우던 잔디가 클로버와 야생 쑥 등의 침범으로 관리가 어려워지자 우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잔디밭을 다 갈아엎고 그곳을 먹거리를 위한 채소밭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내의 결단이었다.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흙의 경우는 간단하다. 갈아엎고 다른 용도로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원의 가운데는 소채 밭으로 가장자리는 화원으로 만들게 되었다.


사실 근대적 인식론을 뒤집는 것도 간단하다. 근대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거꾸로 뒤집으면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가 된다. 이것이 현대적 사유의 시작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다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고중세와 근현대적 사고는 중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해석학자 가다머는 역사를 영향사의 지평으로 이해했다.


나의 정원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부터 봄이 되면 잔디가 있던 자리에는 거름을 먼저 뿌리고 흙을 뒤엎어서 여러 가지 채소 모종을 심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원의 주변에는 어디에선가 날아와 퍼져있던 신선초와 머위 등의 군락이 봄이 되면 다시 생기를 머금는다.


지난주에는 아내가 정원의 빈자리 몇 곳에 인터넷에서 주문한 화초들을 심었다. 대부분 내가 아는 작은 장미, 패랭이꽃 등이었지만 특별한 것이 하나 눈에 띄어서 물어보니 은엽 아지랑이라고 했다.


은회색의 몽글몽글하게 뭉쳐진 잎들 위에 기다란 줄기들이 올라와 노란 꽃망울을 맺는데 처음 보는 화초의 신비로운 생명현상이었다. 이런 식물이 어떻게 생태계에서 발생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과의 만남 자체가 내겐 너무 신선한 경험이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자신이 아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 해변가의 조약돌 하나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고 체험하고 느끼고 공감하고 표현하는 것도 너무나 미세하고 부분적이다.


물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고 숲은 나무들의 합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조각난 부분들을 모은 것 이상일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볼 것이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은엽 아지랑이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세계를 보며, 그 꽃의 피어남 안에서 시간의 세계를 보며, 그것을 보는 이 순간 동시에 영원한 지금을 산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내게 가져다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