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수국
정원 북쪽 건물 좁은 길에는 라일락 감나무 수국 노랑 해당화 철쭉 대나무가 터널을 놓았다. 라일락 꽃이 피기 시작하면 노랑 해당화도 무성하게 꽃문을 연다.
라일락 꽃보다 오래 피어 있는 해당화는 생명력도 강하다. 매년 가지를 다듬어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영역을 넓힌다. 그래서 옆에 있는 수국이나 철쭉의 해바라기를 막아버리곤 한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화려할수록 조연들은 외모보다 연기로 승부를 봐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도 주연을 따는 여배우는 소수이다. 생태계에서는 주로 수컷이 화려하나 인간의 세상에서는 반대이다.
노랑 해당화가 만개하고 질 무렵에 그 밑에 있던 낮은 키의 흰 수국이 조심스럽게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운다. 흰 수국은 시간이 지나면 주로 붉은빛으로 변하다가 보라색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주로 토양의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일찍 보라색 수국을 보기 위해서는 산성을 가진 흙을 투입하는데 그렇게 해서 보랏빛이 은은하게 나타나는 수국 꽃의 길을 걸은 적이 있다. 푸른 장미도 가능해진 시절이니 미디어 시대에 성형 미인도 넘쳐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미학적인 문제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감정이다. 개인마다 좋아하는 꽃들이 있겠지만 꽃들이 가지는 미의 보편적 형식과 감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어떠한 인공미도 자연미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게 정원사들의 오랜 경험이다. 나는 기하학적 조형미를 가진 프랑스식 정원보다 자연미를 강조한 영국식 정원을 선호했다.
그렇지만 모든 정원은 야생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모방이며 그런 점에서 예술이고 인위적 가공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TV 시리즈에 나오는 어떤 자연인도 원시인처럼 살 수는 없다.
흰 수국이 피어나면 순수미를 넘어서 숭고미를 발견한다. 흰 수국은 예술적 묘사의 대상을 넘어서 종교적 상징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불두화가 흰 수국을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예술의 역사는 순수예술이 나오기까지 거의 종교적 표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귀족의 문화와 평민의 문화로 각각 병행하여 발전해왔다. 시민사회가 오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예술품을 누구나 볼 수 있고 저작권이 지난 명품은 기술적 복제시대에 복제품으로 상품이 되었다.
아직 과학이 어떤 생명도 변이 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안도를 느낀다. 흰 수국을 보며 내가 위로를 받는 점도 그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모방하거나 재현할 따름이다. 이 한계가 계속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