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깨달음
힌두이즘은 인간의 생애에서 다음의 네 가지 목표를 깨닫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1. 카마(Kama):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의 집착, 2. 아르타(Artha) : 세속적 부와 재산의 축적, 3. 다르마(Dharma): 종교적 의무의 준수, 4. 목샤(Moksha): 신-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해방, 이 네 가지 중에서 카마는 가장 낮은 것으로 여겨진다. 아르타는 주로 인간에게만 나타나고, 카마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르마는 다음 아닌 자기희생의 훈련이다. 그러므로 다르마가 앞의 두것보다 더 높다.
목샤는 '해방(liberation)'을 뜻한다. 이는 신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힌두이즘은 신의 편재(omnipresence)를 믿고 모든 인간에게 '신성(Dvinity)'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어진 모든 시간에 신성은 모두에게 똑같이 존재하지만 똑같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영적 수행의 목적은 이 고유한 신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신성이 명확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신-깨달음의 영혼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목샤를 달성한 것이다.
이 신성이 인간의 '진정한 자아'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핵심 자체를 형성한다. 외부의 것은 포기할 수 있지만 존재의 핵심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머지않아 이 진정한 자아, 혹은 신성이 명확해질 것이다. 몇몇 고도로 진화된 영혼은 이번 생애에서 혹은 이번 생애의 죽음에서 목샤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진화되지 않은 영혼들은 몇 번의 윤회가 더 필요하다. 이 스토리를 들으면서 불교인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불교의 승려들이 이야기하는 견성이나 해탈과 다를바가 없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보다 확실한 사례를 들어보자. 한국의 고승 성철 스님이 남긴 [선문정로]의 제1장은 견성즉불(見性即佛)이다. 견성성불이 아니고 견성즉불이다. 불성(신성)을 깨달으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佛: 부처)의 자리이다. 견성은 사실 목샤와 다를바 없다. 제2장은 중생불성(衆生佛性)이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핵심 요소이다. 중생(衆生, sattva)은 산스크리트어 sattva의 번역어로, 유정(有情)이라고도 한다. 이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 즉 감각과 의식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대승의 경전인 [대열반경]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역시 힌두이즘과 본질적으로 뿌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가 제시하는 견성의 가장 효율적 방법인 화두선은 일반인에겐 너무 어려운 수행법이다.
다시 힌두이즘으로 돌아가자. 인간은 카마나 아르타를 추구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무한한 지복인 자신의 '신성한 자아(Divine Self)'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인간은 유형적 물질과 무형적 지식을 풍부하게 소유해도 뭔가 마음 한 구석에 갈증이 남아있다. 이러한 각성이나 갈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에서 무한한 지복의 샘물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없는 곳에서, 모든 곳에서 충만한 신성인 신을 경험하게 된다.
정말 그럴까? 과연 이런 이야기를 현대의 발전된 뇌과학이나 양자물리학이 증명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고대인의 신념에 불가한 것일까? 종교와 철학의 차이는 전자가 일단 믿어보라고 권유하는 반면에 후자는 의심할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의심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이유는 모든 이론이 검증과 반증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듯이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모든 고대의 해방에 대한 서사가 신석기 혁명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길이 이미 현대 과학의 수 많은 발견으로 널리 열려있다. 과연 초기 인류에게는 어떤 원형적 삶의 목표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