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매 순간 빛난다 5

숨 쉬는 한 희망이 있다

by 박종규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북섬의 오클랜드 공항에 잠시 착륙하여 새로운 승객들을 태우고 곧장 인천 공항으로 날아갔다. 하늘에서 본 오클랜드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답게 큰 빌딩과 더불어 항만에는 상선뿐만 아니라 개인 소유로 보이는 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주말 스포츠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요트를 타는 것이라 하니 아마 누구나 성공한 사람들은 요트 한 척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북유럽에서 대개 가정에는 여름 별장이 하나씩 있다고 한다. 요트를 보면서 갑자기 어머니의 병으로, 외삼촌 집에 맡겨진 어린이의 성장기를 다룬 「개 같은 나의 인생」이란 영화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 북유럽인이나 뉴질랜드인의 조상이 다 게르만족의 후예라는 흔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아버지는 딸에게 진주조개잡이 어부가 되어 조개에서 발견한 영롱한 진주들로 목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할 것이다. 나도 딸에게 그런 빛나는 기억의 진주를 모아주고 싶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항상 진주와 같은 찬란한 기억만 남는 것은 아니다. 때론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기억도 함께 박혀있다. 사실 모든 영광은 고난과 함께한다. 진주는 고난을 극복한 삶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몸 안에 들어온 이물질을 조개 안의 진주 성분으로 감싸서 만든 것이 바로 진주이다. 이런 경험은 선물로 줄 수도, 가르쳐줄 수도 없다. 아마 좀 더 힘든 여행을 함께 함으로써 극복의 힘과 자신감을 서서히 길러주는 것이 최선이다.

언제나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온다.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구름 아래에는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구름 위의 태양은 늘 빛난다. 비와 폭풍 혹은 힘든 겨울을 지나면 어느새 비둘기는 울고 사과꽃은 향기를 풍긴다. “아빠! 이 기숙사 방은 냉장고 안처럼 너무 추워” 중국 저장성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제자들을 만나서 일박하게 된 닝보공대 기숙사에서 초등학생이었던 딸이 한 말이었다.“ ”여긴 저기 달린 에어컨을 겨울에 온풍기로 쓴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따뜻해질거야.“ 방학이지만 동계 연수를 듣는 아내가 올 수 없어서 어린 딸과 한 침대에서 냉기가 가득 찬 대학 기숙사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보낸 소중한 밤이었다.

아이들은 조금만 성장하면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어떤 대나무 순은 대밭과 멀리서 솟아나지만,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하늘로 솟구친다. 어린 새도 비상을 시작하면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날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명산 중에 강서성(장시성)에 위치한 삼청산이 있었는데, 제자들의 초청으로 그때도 아이만 데리고 강서성 일대를 여행하게 되었다. 삼청산은 설악산의 울산바위보다 서너 배나 큰 바위들이 병풍처럼 정상에 버티고 있었다.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있었으나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절벽 옆으로 고정된 인공 길을 만들어서 산 절벽 주위를 도는 아찔한 코스가 많았다. 도대체 중국인들의 이런 무모한 발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 내려서 오르고 내려가는 여정은 산 자체가 거대하고도 신기한 형태의 큰 바위였기에 산행에 익숙한 성인 남성에게도 아주 힘든 코스였다. 제자가 힘들어하는 딸에게 만개의 계단을 걸으면 등산도 끝난다고 말하니 그때부터 한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어느 순간에 아이는 이렇게 외쳤다. “만개 째 계단이네. 이제 다 왔어.“ 당시 엄청나게 지친 일행은 이 외침에 힘을 얻어 다시 케이블카 정착지까지 모두 무사히 내려왔다. 계단의 액자에 아직도 붙어 있는 푸른 하늘 아래 우람한 삼청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에서 유달리 빛나는 것은 가장 어린 딸의 얼굴이었다. 아마 아이는 우리의 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장차 다가올 힘든 날들을 이겨나갈 소중한힘을 그 산에서 얻었을 것이다.

때론 액체 비타민을 주입한 링거액은 노란빛이 감도는 언더락 잔에 담긴 브랜디 위스키와 같다. 물론 부드러운 목 넘김도 없고 과일주 특유의 달콤한 향도 느낄 수 없지만, 진통제를 넣었을 때 링거액은 혈관 속으로 서서히 들어와 코르티솔의 분비를 촉진한다. 나는 자율 교감신경계가 다시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응급실이었다. 여전히 복부 통증은 남아 있었고 진단 결과는 급성 복막염이었다. 강도 높은 지진에는 여진이 따른다고 한다. 여러 지층으로 연결된 지반이나 우리 유기체의 기관들도 마찬가지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

이 년 전 수술 후 맹장의 위치가 위에서 아래로 바뀌면서, 복통의 원인이 맹장염이란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바람에 그대로 맹장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행히 복부 전체가 오염되지 않았기에 절제 수술 없이 복부 세 군데에 구멍을 뚫고 복강경과 세척기로 봉합과 세척을 완료했다. 아픈 후 이상하게 종합병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고 와야 할 곳,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곳으로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사실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곳곳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이필요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좀 괜찮아요?” “이제 좀 덜 아프네, 아이는?” “도련님 집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통증이 조금 줄어들자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아직 미성년인 아이 걱정이 먼저 들었다. 병으로 고통을 받는 일은 환자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 전체와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에게도 함께 부담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 긴밀하든 느슨하든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바로 누군가 위기의 처한 상황일 경우이다. 우리는 북극곰이 처한 위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남극 펭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아이와 함께 저장성 항주에 도착하니 그 성에 사는 제자 네명이 마중을 나왔다. 지난번 개인적으로 한번 온 적이 있던 곳이지만 아이와 온 것도, 중국인 제자들과 저장성 일대를 여행하기 위해 온 것은 처음이다. 겨울철 항주의 서호는 찬 바람에 움츠러든 듯 고요했고 유람선은 그 위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교수님, 저기 보이는 섬 같은 곳은 공산당 고위 간부만 머물 수 있는 별장입니다. 관광객도 갈 수는 없어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그런 특별한 장소가 있지. 미국에도 특수층만 가는 별장 지대가 있다고 들었어.“ 지난번 학과 행사로 상해와 소주와 항주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조선족 여행 안내자는 중국 민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죽고 가는 천당을 잘 믿지 않는 중국인들의 최고 소원은 광동성 출신 요리사를 고용하고, 소주에서 부인을 얻어서 항주에 사는 것이랍니다.“

“왜 소주의 여인을 얻으려 하고, 또 항주의 집에 살고 싶은 이유는 뭐죠?” 난 즉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 그건 소주에 미인이 많고 항주는 공기나 물이 좋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가 소주에 갔을 때 비단 공장에 나온 모델 여인들 말고 거리에는 미인들이 잘 안 보이던데.“ 그는 아주 상식적 답을 내게 주었다. ”소주 미인이 왜 걸어 다니겠어요? 소주 미인은 주로 비싼 외제 차를 타고 다니니 거리에 잘 보일 수 있겠어요?“ 소주는 운하 도시였다. 비단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도시이니 자연스럽게 부자 상인들은 중국 각지의 미인들을 본처나 후처로 들였을것이고, 자손들은 그 미모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항주 인근에 송나라 시대를 재현한 송성(宋城)이란곳에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는 종합공연과 비슷한 쇼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여인들은 한국인과 달리 다리가 길고 얼굴은 더 갸름했다. 공연이 끝나고 포토타임이 있어 아이는 한 무희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 안에서 비록 국적이 달라도 손을 잡은 두 소녀의 밝은 표정은 집 이층 계단의 액자에서 지금도 반짝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청춘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마 청춘의 숨 안에는 항상 희망이 빛나고 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둠 스피로 스페로, dum spiro, spero, 숨 쉬는 한 희망이 있다‘


복막염 수술 이후 담당 의사는 입원실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그 정도 상태면 집에서 회복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몰라도 우리에게 조금 빨리 퇴원하기를 권유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잘 걸을 수 없었기에 일주일 내내 침대 위에서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아내와 아이는 이제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에 적응해가는 것 같았다. 당시에 얻은 전세 아파트는 대로변에 남향과 서향을 동시에 바라보는 50평의 아파트였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아파트여서 그런지 수납장도 충분히 갖추고 방도 4개나 되니 세 가족이 살기엔 좀 넓은 집이었다.

아이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촌 오빠 집에 자러 가기 전에 혼자서 이 넓은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싫었어. 그리고 아빠가 다시 아프니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밀려오니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 당시에 말은 안 했지만.“ ”그렇구나.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단다. 지금 생각하니 누구라도 불러서 너와 함께 집에 있도록 할 걸“ 우리는 거실에 원예를 전공한 사람의 조언에 따라 실내에도 잘 생존하는 큰 고무나무 화분을 갖다 놓았는데, 이 나무는 지금도 우리 집 거실에서 푸른 이파리를 펼치고 있다. 다행스럽게 아이도 이 고무나무처럼 푸르게 자랐다.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서 그런지 공기는 북쪽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신선했고, 거리에서 가끔 올라오는 차량의 매연은 집이 아파트의 고층에 있는 탓인지 그렇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남향으로 난 침실은 비교적 컸고 문을 닫으면 차량 소음이 잘 들리지 않았기에 하루 동안 따뜻한 햇볕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나의 깊은 마음 안에서는 ’당신은 이번에도 잘 견뎌낼 것이야‘라는 장기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실 나는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다른 나들이 있는지 예전에는 몰랐다. 심장에도 내가 있고, 간장에도, 폐에도 각자 다른 내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두뇌의 일부에 있는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나의 부분들 안에 있는 나란 각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다 들 잘 견뎌주어서 고맙다고‘


죽에서 밥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또 다른 여진이 시작되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누가 가져다준 멧돼지 고기를 넣고 끓인 국을 먹다가 장이 부분적으로 막혀버린 것이었다. 완전 장폐색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이번에도 입원실 행은 막을 수 없었다. 종합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담당 의사의 권유로 레빈 튜브란 특별한 치료 장치가 있는 연합 외과에 입원하였다. 레빈 튜브란 장치는 코로 미세한 공기관을 장폐색 부위까지 주입하여 막힌 내용물이 내려갈 수 있게 가스를 빼고 내부 압력을 낮추는 기계라고 의사는 설명하였다. 코로 튜브를 넣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기관지에 염증이 있는 상태에서 들어간 큐브는 계속 기침을 토하게 했고 결국 하루 만에 튜브를 빼고 수액과 영양제를 혈관으로 공급하고 금식을 통해 결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항주에서 하루를 머문 일행은 다음날 여학생의 고향인 리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남산죽해(南山竹海)란 대나무숲이 유명한 데, 아마 와호장룡이란 중국영화를 본 사람이면 흔들거리는 대나무에 서 있는 주윤발의 모습과 더불어 배경으로 나오는 장대하게 펼쳐진 대나무숲 장면을 기억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였다. 사람들은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을 실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예술이 가지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표현이 때로는 사람들을 꿈과 현실이 중첩된 제3의 세계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기억조차 왜곡된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실제로 벌어진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곧장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또는 자신만의 가상 공간에 저장하기에 가물가물한 기억을 그때의 사진과 비교할 수 있지만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 혹은 그 후에도 사람들의 기억은 그렇게 정확하지 못하다. 사실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은 없다. 게다가 소환된 기억도 왜곡된 기억일 수 있고, 심지어 나의 경우에는 반복해서 꾸는 꿈이 실제 나의 경험인 것으로 착각하는 수도 있다. 나는 때로 활짝 핀 수많은 벚꽃 나무들이 마치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난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빛나는 꿈을 꾸곤 하는데, 이제는 언젠가 실제로 내가 그런 곳에 있었다고 믿기로 했다. 기분 좋은 꿈을 굳이 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보들레르도 항상 취하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헌 술이든, 새 술이든, 공상이든 상상이든, 그것이 망상과 광기 어린 꿈만 아니면, 그것에 마음껏 취해서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의 끔찍한 중압이 네 어깨를 짓누르면서 너를 이 지상으로 궤멸시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술로, 시로, 사랑으로, 구름으로, 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물 위에서나 당신만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줄 것이다.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보들레르

중국인들은 손님을 접대할 때 대개 10가지 이상의 요리와 백주라는 도수 높은 고량주를 함께 주문한다. 이 술은 요리와 차와 함께 천천히 마시지 않으면 외국인들은 금방 인사불성에 빠질 수도 있다. 대개 중국인들은 이런 식사를 평균 2시간 이상 걸려 대화를 많이 하며, 대륙인답게 천천히 술과 차를 병행해 마신다. 처음 초대받았을 때 중국에서 서로에게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까닭에, 학부모와 그의 친구들이 권할 때마다 술잔을 비웠다.

다행히 당시의 내 몸은 중국 백주에도 잘 버텨서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나 그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한국인이 중국인과 식사할 때, 한국식으로 술잔을 한 번에 비우면 금방 취하게 된다. 중국인의 관례라면 손님의 술잔이 조금만 비워져도 즉시 직원이 그 잔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술 한잔에 차 몇 잔을 함께 마셔야 한다. 마지막으로 좀 취했다고 생각하면 술잔을 엎어놓고 정중하게 사양하고, 건배 제의에 차나 물을 들고 마시는 것도 허용된다.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 5년간의 이러저러한 접촉을 통해 모종의 신뢰가 구축되어야만 중국인은 외국인이든 서로에게도 평생 친구란 관계를 유지한다.

근대화와 현대화를 압축해서 급성장한 한국인들은 느림의 미학을 잊어버렸다. 가끔 대학에서 특정 학과가 인근의 고택에서 행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함께 가보면 한국의 전통문화 역시 느림의 미학을 보존하고 있었다. 오래 묵은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의 짙디짙은 검붉은 빛깔은 그 색조를 머금기까지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왜 요즘 우리는 그렇게 조급해졌을까? 무엇이 우리를 몰아치고 있기에 그렇게 빨리 변해야만 했을까? 사랑도 우정도 가을 사과나 홍시처럼 서서히 익어가는 것인데, 너무 빨리 급하게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100년도 못살 인생이 애써 노력한다고 죽음이 늦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수술을 앞두고, 몇 년 전에 먼저 간이식 수술을 한 선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힘든 투병의 긴 과정이 계속되더라도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게“ 그분도 지금 21년 이상 지금까지 살아있고, 나도 16년을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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