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뇌한다
담석으로 인한 통증이 작아지면서 의사는 담낭 제거 수술을 권유했다. 일반적으로 담낭 제거는 그렇게 어려운 수술이 아니다. 복강경을 통해 절제된 담낭을 흡입기로 빨아들이고 때 낸 자리를 봉합하면 그것으로 간단히 끝난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촬영 결과 담낭이 복부와 너무 가깝게 혹은 유착이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사는 복강경으로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복부 절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다시 복부를 절개해도 괞찮을까?” “솔직히 그런 통증을 다시 겪지 않는다면 뭐라도 하고 싶어”
오랜 투병 과정에서 터득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미 2000년 전에 나사렛 예수가 한 말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니 과거를 후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대부분의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걱정을 당겨서 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생체는 그때그때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게 진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신체에 맡겨야 한다. 두뇌를 특히 좌뇌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생체 호르몬의 분비가 감소한다.
다시 마취에서 깨어나니 입원실이었다. 회진을 위해 온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담낭이 유착되지 않아서 복강경 수술이 가능했어요. 이제 앞으로 그런 통증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기름진 음식은 적게 드시고 당분간 간이나 췌장을 활성화하는 약을 일 년 정도 복용하셔야만 합니다. 췌장 기능도 상대적으로 악화돼 있으니까요.” 우리의 몸은 장기나 사지 중 하나가 없어져도 전체 세포가 협력하여 그 부분을 대체한다. 이것이 자동차와 우리 몸의 차이이다.
자동차에서 바퀴 하나가 아니면 클러치가 망가지면 자동차는 달리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일부가 잘려 나가도 생존을 계속한다. 그러나 문제는 산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을 오랜 고통과 직면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아닐까? 하지만 객관적인 반성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런 생각과 대면하고 싸우고 싶었다. 과연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도대체 두뇌의 어느 부분에서 혹은 무의식의 어떤 경향에서 오는 신호일까? 내가 프로이트의 타나토스 즉 죽음의 충동을 연구한 이유는 바로 이런 생각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였다.
담석증 수술 이후 사고가 난 경우 이외에는 갑작스럽게 응급실에 갈 이유는 사라졌다. 몸의 혈관 계통은 비교적 건강하였기에 뇌출혈이나 심장병의 위험은 비교적 적었다. 주요 문제는 암이 재발만 안 되면 조심조심 줄타기 인생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인생은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모든 인생의 길은 항상 위험한 행로이다. 몸과 마음은 언제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상처의 일부는 의도적으로 억압되었다가 마치 자연 불로 다 타버린 아프리카 초원에서 일순간 폭우가 쏟아지면 갑자기 온갖 종류의 풀들이 갑자기 나타나듯이 불안한 의식의 지평을 형성한다. 몇 달에 한 번씩 예전에 공부를 함께 하던 교수들이 모여서 인문학 세미나를 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정신의학과 학과장을 역임한 의대 교수 한 분이 계셨다. 이분은 약물 치료보다 상담 치료를 선호하시는 분이었으나, 실제로 그가 길러낸 제자들 다수는 제한된 시간에 많은 환자를 접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로 약물 치료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미나에서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였던 그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로 정신과 의사나 상담치료사들이 예약을 잡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소파나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통해 심리적 문제를 장기간 해결하던데, 왜 한국에는 그런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나요?” “다 수입 때문이죠. 그렇게 해선 큰돈을 벌지 못해요. 긴 시간의 상담에 비싼 상담료를 낼 환자도 그리고 의료보험 시스템도 환자와의 상담 시간을 늘릴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분도 한국인의 정신건강이 점점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뒷받침할 의료 체계가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마음은 뇌에서 발생하지만 다른 사람의 뇌에서 전달되는 긍정적 사회적 신호를 통해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예민한 센서를 지니고 있다. 상담심리학자들이 ‘치유 이야기’라고 부르는 치료자와 내담자 사이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치유를 위한 이야기들은 내담자에게 스스로 자율신경계를 조절할 회복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마음의 질병이 점점 더 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젊은이들이나 독거노인을 위한 상담 시스템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살률이 높아가는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불안 즉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피하기 위함이다.
“내가 심리학에서 한계를 느낀 것은 정신과 의사는 내담자에게 초월의 힘을 길러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초월의 힘, 그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주체적 자각을 뜻하나요?”“내가 세미나의 수장인 교수님이 연구한 사르트르에게서 그리고 약간 반대 경향이지만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초월이란 개념이지요. 사르트르는 <자아의 초월성>을 주장했고, 하이데거는 <존재는 단적으로 초월>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심리학자들은 주로 결정론적 모델로 접근하기에 과학적 인과론의 지평에 머물고 말지요.” “이미 뇌의 신경계가 파괴되어 있는데, 어떤 초월의 능력이 뇌에서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까요?”
사실 나는 실존주의자들에게서 별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 투병을 통해 최소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대해서는 찬성하게 되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과거에 의해 결정되어 있어도, 그래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나의 실존적(實存的) 혹은 탈존적(脫存的) 존재 방식으로 그것을 초월한다. 어렵게 표현하면 나는 나의 타자(他者)가 아니다. 나는 살아있는 한 지금 여기에서 솟아오르는 내 신체 전체의 에너지이고 동시에 지향적 의식의 초월적 불꽃 자체이다. 촛불은 빛날 때만 촛불로 존재한다.
남경에 있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이미 취직한 제자들과 그리고 저장성 출신 제자들 그리고 몇 번의 순회 중에 인연이 닿은 중국인들과 이틀 동안 몇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나는 국경을 초월한 인간이 인간이라는 조건만으로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해 설파했고, 시작하기 전에 늘 우리는 한국인, 중국인이기 전에 모두 사람(Human being)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매화나무에 핀 꽃들이 수없이 많아도 모두 매화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국경을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서로 구분하고, 때론 싸우고 때론 협조하는가요? 한국인들은 우리보다 더 편 가름이 심한 것 같아요,” 한 제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모든 사회나 시대마다 집단들 사이에 그런 구별과 투쟁은 존재하지.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국적이 달라도, 저마다 가진 소유가 달라도, 심지어 이념과 가치가 달라도 이렇게 개방된 모임을 한국에서부터 해오지 않았느냐? 이런 조그만 연대가 우리의 미래를 언젠가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그래요. 막상 회사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도 무슨 성 출신인지, 아니면 무슨 대학 출신인지 또는 어느 부장 라인인지 이런 게 있어요. 같은 중국인인데도.”
남경에서 리양으로 간 우리는 학부모의 융숭한 대접과 서예가의 선물을 받고 일박을 한 다음 바로 저장성 학생들의 모교인 닝보공대로 향했다. 닝보공대 기숙사에 거처를 정한 다음 얼마나 추운 밤을 보낸 지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가 있다. 중국의 남부 지방에는 겨울에 난방시설이 거의 없다. 처음 상해에 갔을 때, 푸동 지역의 고급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전체는 마치 대형 냉장고와 같았다. 다행히 조선족이 사는 집이라서 방마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 매트를 깔아 놓았기에 자는 동안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밖의 시간에는 항상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벽에 달린 에어컨에서 나오는 미약한 온풍으로 추위를 이기자니 그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에 학생들의 은사인 젊은 교수가 산 교내식당의 조식은 우리 아이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 교수는 엄청나게 큰 부피를 가진 찐만두들이 가득 찬 큰 대나무 쟁반을 몸소 들고 왔는데, 만두 하나의 크기가 두 손을 모은 것보다 더 컸다. 이어서 학생들이 500 미리 정도의 따뜻한 두유 팩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아이는 자기 얼굴만큼 큰 만두와 두유를 보고 잎이 딱 벌어졌는데, 그 순간을 찍은 사진에서는 아이의 놀란 얼굴이 아직도 이층 계단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암의 발생 시 재발의 위험 기간은 우선 5년에서 6년 안으로 본다. 5년이 지나면 국가에서 보조하던 특별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며, 수술 후 6년이 지나면 특정 보험에 재가입할 수도 있다. 수술 후 일 년 동안은 3개월마다 검사를 하다가, 이 년이 되면 6개월마다 그리고 3년 정도 지나면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PET-CT로 불리는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술로 재발 여부를 검사한다. 물론 복부 CT나 수술 주위 장기에 관한 MRI(자기 공명영상 촬영)도 함께 시행한다. 검사 결과를 보는 날은 마치 생사 판정을 기다리는 중범죄를 저지른 미결수처럼 환자와 보호자는 극도로 긴장해서 마음을 졸이며 대기실에 앉아 기다린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면 대개의 환자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기 마련이다. 담당 의사는 나에게 한국의 유명 대학병원 원장의 세 차례 암 투병기를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그는 두 번의 재발에 수술을 거듭하고도 항암을 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나는 두 가지 경우를 상상하곤 했다. 첫째 최악의 상황에도 예외는 있게 마련이고, 두 번째 내가 만일 아무런 탈이 없이 살고 있어도 불시의 사고로 죽거나 지구 자체에 멸망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학부 시절부터 이 말을 가끔 생각해 봤지만 ‘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할까?’라는 의문이 항상 들었다. 우주의 역사를 연구하던 현대의 우주 물리학자들은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주 전체로 보면 죽음 즉 무 생명의 현상이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이고, 생명의 활동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먼지에서 다시 그 먼지로 돌아가게 마련인데, 굳이 사과나무를 왜 심어야 할까? 영혼의 불멸이나 윤회를 주장하는 종교인들은 그런 것들이 다 허상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말이 다 헛된 말이었다. 사실은 사실이고 허구는 허구이다. 아무리 경건한 허구도 본질적으로 허구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또 하나 있다. 적어도 오늘 혹은 지금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사유가 가장 깊어지는 순간은 바로 죽음을 직면한 시기이다. 나는 대학 강의실보다 병원 대기실에서 가장 철학적인 사유를 하였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