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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n 04. 2022

시와 철학 1

회상적 사유와 해체된 자아

기억이 나를 본다

                                ——토마스 트란스트 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나의 기억의 총체이다. 기억은 지각의 다발이다. 지각은 인상과 관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아는 지각의 다발이다.


인상은 감각을 통해 마음에 각인되고 인상을 추상적으로 처리한 것이 관념이다. 영국 관념주의(흔히 경험론이라 불리는)의 마지막 주자 흄의 결론이다.


시를 다시 보자. 시인은 기억 속으로 자신의 시적 자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기억을 재구성하고 해석하고 새롭게 표현하는 주체는 하나의 단일한 자아가 아니다.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유월과 아침, 특히 스웨덴의 유월은 우리의 유월과 다르다. 경험은 그것이 감성적이든 오성적이던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그 제약 속에서 현상은 구성된다.(칸트) 시인의 유월은 그 시인의 주관이 구성한 유월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와 반대로 사유한다. 나는 나의 기억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오히려 나를 본다. 내가 기억의 주체가 아니라 기억의 지평 위에서 시인의 경험이 사건으로 드러난다.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밖으로 나간다. 이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다. 기억의 부름이 녹음으로 무성하다. 시인의 눈은 기억으로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회상이 그의 시각을 변모시킨다.


회상적 사유는 주체의 인식이 아니다.(하이데거) 더구나 주체의 기억이 아니라 깊은 기억의 층 속에 매몰된 무의식도 아니다. 잃어버린 원형의 회상이 나를 따라온다.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인식의 주체에게는 인식이 전경(前景)이라면 기억은 오히려 배경이다. 회상적 사유에서 배경은 전경으로 등장하면서 인식의 주체는 해체되어 시적 차연(差延, différance)으로 등장한다. (데리다)


시적 자아는 그런 의미에서 카멜레온적 자아이다, 해체와 재건의 사건이 시인에겐 회상과 창작으로 동시에 발생한다. 한때 폐기되었던 기억이 창작의 용광로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변신한다.


“새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시 현전 하는 사실이 현존재에게 엄습한다. 존재는 새소리로, 바람소리로, 스웨덴의 자연으로 시인의 회상 안에서 생기한다.


기억의 숨소리, 존재의 부름이 회상적 사유와 해체된 자아를 시의 세계로 동시에 등장시킨다. 그래서 시인은 듣는다. 근원의 숨소리를 시적 회상 속에서, 북유럽의 자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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