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규 Jun 07. 2022

시와 철학 2

유일회적 실존의 미학

두 번은 없다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문명과 더불어 우주와 인생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는 서사적 거대담론(리오타르)이 출현한다. 기원 신화에서부터 불멸에 관한 욕망, 그리고 부활과 윤회의 서사시를 거쳐 현대에 도달한 것은 바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문학적이고 철학적 분석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피쿠로스) 죽음은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삶에는 끝이 없다.(비트겐슈타인)


과연 죽음은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모든 존재자 중 인간(현존재)만이 자신의 죽음을 선취적으로 사고하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하이데거) 그런한에서 나는 유일회적 실존이다. 이 실존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유일회적 삶에 대한 보편적인 자각이며 통찰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영혼의 불멸이나 윤회의 환생을 믿는다 해도 현존재의 실존적 존재방식 안에서는 어떤 방식의 삶의 연습도 죽음의 훈련도 불가능하게 한다. ‘지금 여기’는 인간 실존만의 고유성이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현존재의 실존은 존재의 근원을 단독적으로 사유한다. 근원의 물음 앞에 우리는 단독자로 선다. (키에르케코르) 단독적인 삶에 우열은 없다. 비교가 끓어진 자리가 나타난다. 그것이 곧 절대의 영역이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만물은 항상 흐른다. 동일한 순간은 하나도 없다. 시인은 그래서 순간의  하나하나에 전적인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실존은 공존이다. 현존재는 세계 내 존재이다. 현존재는 관심과 배려를 통해 공존하고 근심과 불안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하이데거) 나의 실존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다. 나의 실존이 공존과의 신뢰 속에서 인지될 때 시인은 장미꽃의 낙화로 비유한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실재계와 상상계와 상징계는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 상상의 기호 밖에 실재가 존재하고, 그것이 상징의 규칙 안으로 전이되면서 기호의 의미의 실재성을 상실한다.(라깡)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둘 다 아니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실존의 삶은 힘들다. 왜냐하면 부단한 결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불안으로부터 드러나는 죽음 또는 무라는 경계선 위에서 초월론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존으로서 실존은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공존과의 교감 속에서 실존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각자성(各自性)을 획득한다. 개별성은 각자성이다. 각자성은 그것이 시간성 속에서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것이 바로 실존의 운명이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


이전 01화 시와 철학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