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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n 09. 2022

시와 철학 3

사태 자체(事態自體)의 현상학

그 장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그 장미는 쓸모가 없다

하지만 꽃잎은 저마다 가장자리에서

끝이 난다. 대기의 고랑 진

기둥들을 결속시키는

그 이중의 면—가장자리는

자르지 않으면서 자르고

무(無)와—만나서—금속이나

도자기로 탈바꿈한다—


어떻게 될까? 끝이 난다—


하지만 만약 끝이 나면

처음이 시작되니

그리하여 장미를 끌어 드리는 것은

기하학이 된다—


더 날카롭고 더 정교하고 더 다듬은

마욜리카 도기에 새겨져—

그 깨진 접시는

한 송이 장미로 윤이 나고


어딘가에서 그 감각이

구리 장미를 강철 장미로 맞는다—


사랑의 무게를 지고 있는 그 장미,

하지만 사랑은 장미들의 끝에 있다

그것은 사랑이 기다리는

꽃잎 가장자리에 있고


빳빳한, 부자연스럽지 않게

작업한—여리면서

단호하고, 촉촉하고, 반쯤 자란

차가운, 정확하고, 감동적인,


무엇


꽃잎 가장자리와 그 사이

어느 곳


꽃잎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시작된다 하염없이 가늘고 하염없이

단단한 그 강철의 존재가

은하수를

뚫고 들어간다

접촉도 없이—거기에서

올라간다—매달리지도 않고

밀리지도 않고—


멍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데카르트의 주관주의는 칸트의 구성주의를 거쳐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에서 완성된다.  현대사상은 헤겔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저항 중 하나가 현상학이다.


현상학의 슬로건은 ‘사태 자체로 (事態自體로, zu den Sachen selbst)이다. 독일어 Sache는 영어로 affair, thing, object라는 의미이다.


브렌타노와 후설을 거쳐 이 슬로건은 존재론적 전환을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러 존재사유로 발전한다. 이것은 예술사에서 주관에 치중한 인상주의가 표현주의로 극단화된 것에 반발하여 신사실주의가 출현한 것과 유사하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라”(Say it, no ideas but in things)는 윌리엄스의 시론(詩論)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그 장미는 쓸모가 없다 하지만 꽃잎은 저마다 가장자리에서 끝이 난다. 대기의 고랑 진 기둥들을 결속시키는 그 이중의 면—가장자리는 자르지 않으면서 자르고 무(無)와—만나서—금속이나 도자기로 탈바꿈한다—‘


왜 시인은 장미가 쓸모없다고 했을까? 사실 모든 사물은 현상학적 판단중지(epoche)를 통하면 일체의 가치 개입이 중단된다. 그저 꽃은 꽃잎에서 공간적으로 제한된다.


내용이 제거된 형상으로서 장미는 곧 무와 만남이다. 그런 장미를 은유로 변용하던가 아니면 금속이나 도자기로 변환시키는 것은 제작자의 몫이다. 시학(詩學)은 제작(making)의 기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어떻게 될까? 끝이 난다—하지만 만약 끝이 나면 처음이 시작되니 그리하여 장미를 끌어 드리는 것은 기하학이 된다—‘


사물이나 사태는 내용이란 성질이 제거되는 순간, 공간적 도형이 되고 이 도형은 곧 기하학적 대상이 된다. 모든 물체는 연장(延長), 곧 입체적인 공간성을 가지고 기하학이나 수학으로 측정된다. (데카르트)


‘더 날카롭고 더 정교하고 더 다듬은 마욜리카 도기에 새겨져—그 깨진 접시는 한 송이 장미로 윤이 나고 어딘가에서 그 감각이 구리 장미를 강철 장미로 맞는다—‘



형상은 어떤 질료를 만나 실체가 된다. 장미의 형상은 도기에 새겨졌다가, 그 파편의 일부로서 형상을 유지할 수도 있다. 마치 우리의 조각난 일상 속에서 여전히 인간인 형상을 만날 수도 있는 것처럼.


한편으로 장미의 형상은 구리나 강철이란 질료를 만나 구리 장미로 혹은 강철장미로 변한다. 왜냐하면 형상은 비어있는 것, 곧 무이기 때문이다. 형상으로서 존재는 무이다.(사르트르)


‘사랑의 무게를 지고 있는 그 장미, 하지만 사랑은 장미들의 끝에 있다 그것은 사랑이 기다리는 꽃잎 가장자리에 있고 빳빳한, 부자연스럽지 않게 작업한—여리면서 단호하고, 촉촉하고, 반쯤 자란 차가운, 정확하고, 감동적인, ‘



시인은 이 형상에 사랑이란 질료를 부어 넣는다. 장미는 부어진 사랑의 무게를 지닌다. 그리하여 사랑의 감성적 술어들이 추가된다. ‘빳빳한’에서 ‘감동적인’까지의 술어들이 사랑의 무게를 감당한다.


술어 없는 존재는 무의미하고 사랑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사랑은 시인이 부여하는 삶의 가장 풍성한 의미의 무기이다. 그것은 여리면서 단호하고 촉촉하고 차가우면서도 감동적이다.



‘무엇 꽃잎 가장자리와 그 사이 어느 곳 꽃잎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시작된다 하염없이 가늘고 하염없이 단단한 그 강철의 존재가 은하수를 뚫고 들어간다 접촉도 없이—거기에서 올라간다—매달리지도 않고 밀리지도 않고—‘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현상학적 잔여가 남는다. 그것은 순수 체험의 세계이며, 동시에 이 체험은 원본적 사실, 사태에서 사태 연관의 세계 즉 생활세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후설)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사태 속에서 대상들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걸려 있다. 사태 속에서 대상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다.(비트겐슈타인)


꽃의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사태를 형성한다. 선은 강철의 존재와 같은 단단한 연속성으로 은하수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현상학적 환원을 넘어서 시인이 만난 만물 혹은 만유는 존재적으로 하나이다.(헤라클레이토스)



‘멍들지 않는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이기도  마지막 문장은 사태 자체가  시인의 연약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할  있는 마지막 통로는 상상력이다. 감성과 지성이 메우지 못한 세계의 여백은 연약한 상상력만이 메울  있다.  연약함이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유일한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적 사유(Danken) 감사(Denken)이다.(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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