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 읽기 1-3:의미의 지도 3

프롤로그 3

by 박종규

나는 대학으로 돌아가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앨버타 대학 심리학과의 괴짜 부교수와 함께 에드먼턴 외곽의 교도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살인자였던 수감자를 따라 간 경험이 그곳에서 우연히 이루어졌다.


한 달쯤 지나 나는 다시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 사이 두 재소자가 밀고자로 의심되는 다른 재소자를 붙들고 납 파이프로 다리를 으스러뜨린 사건이 일어나 있었다. 충격에 빠진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면 어떨지 실감 나게 상상해 보려고 한 것이다. 며칠이고 상상에 몰두한 끝에 나는 섬뜩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순진한 추측처럼 그런 포악한 행위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손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8-20쪽)

전통적 인성론의 두 범주는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중국에서 유가는 성선설을 법가는 성악설을 채택했다. 전자는 덕치주의로 후자는 패도정치로 이어진다.

한편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보았으며, 마키아벨리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았다.‘


현대 심리학에 오면 본성은 유아기적 경험으로 환원된다. 즉 인성의 형성이 선천성, 개별성에서 후천성, 관계성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이기심은 악이 아니며 애타심도 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적개심이나 살의도 악한 의지가 아니다. 생의 의지나 권력의 의지는 나체가 말했듯이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나도 그 폭력적인 재소자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나는 비록 그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깊은 혼란에 빠졌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듯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의실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학생을 펜으로 찌르고 싶은 충동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그 충동이 의식 속에 명백히 떠오르고 나자 다시 말해서 감정적으로, 또한 이미지화되어 구체적으로 그려지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 충동은 내가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해답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는 물론 내가 아니라 타인이, 그중에서도 악인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걸까 궁금했지만, 그 일이 나와는 무관하리라고 가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20쪽)

피터슨의 이야기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 유사하다. 악인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비범한 혹은 극악한 기질적 성향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도 아나라는 것이다.


물론 아이히만의 법정에서의 태도는 충분히 의도된 사악한 변명이지만 누구라도 관료적 시스템에 종속된다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이다.


피터슨이 느낀 개인적 충동은 관료적 시스템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원천적으로 인간의 무의식 혹은 집단 무의식에 내재한 파괴적 경향 역시 시스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는 라깡이 말했듯이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터슨은 융에게서 즉 그의 분석심리학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융은 피터슨에게 어떤 단서를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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