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지막
'비교신화학 자료'를 공부하고 나자 정말로 악몽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전면적이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어야 했다.
지금 나의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나는 신념이 매우 실제적으로 세상을 빚으며,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넘어서 세상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상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신념의 세계에는 질서가 있으며,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고 도리어 유익하게 받아들이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편으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률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무지해서든 고의로든 이 절대적인 도덕률을 어긴 개인과 사회는 불행해지고 종국에는 파경에 이르고 만다고 믿는다. (28쪽)
초기 문명기에 형성된 신화는 주로 부족이나 사회의 정체성 및 규범과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창조 및 건국 신화는 고대 국가의 사회 제도와 규범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지혁명의 시기 혹은 더 나아가 6-7백만 년 전 초기 인류의 세계 경험과 무리 형성에서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뇌의 진화로 인류의 집단적 학습 경험이 축적되면서 생존을 위한 가장 실제적인 경험이 신화와 더불어 전승되었을 것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적 규범이 신화에 기반을 두고 추론되었으며 그것은 세계의 각 지역에서 독자적이지만 유사한 질서와 제도로 발전했다. 예를 들면 건국의 영웅은 대체로 신적인 요소를 지니며, 사회는 피라미드적 위계질서로 구조화된다는 것 등이다.
세계는 행동의 장 혹은 사물의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학은 세계를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신화와 문학, 연극과 같은 이야기는 세계를 행동이 벌어지는 무대로 그린다.
이 두 가지 세계관은 우리가 각각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탓에 지금껏 불필요하게 갈등을 일으켜 왔다. 과학은 객관적인 세계를 설명하고, 모두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이야기는 가치의 세계를 설명하고, 정서와 행동의 관점에서 현 상태를 평가하고,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존재한다.
행동의 장으로서 세계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영역은 '미탐험 영토 unexplored territory'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이며 위대한 어머니 신, 창조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자연, 모든 유한한 존재의 근원이자 마지막 안식처이다.
두 번째 영역은 '탐험된 영토 explored territory'이다. 이것은 알려진 세계이며 위대한 아버지 신,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문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이다.
세 번째 영역은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흔히 신의 아들, 개인의 원형, 창조적 탐험가(영웅)와 복수심에 불타는 적대자로 비유된다.(29쪽)
피터슨은 세계를 사물의 공간과 행동의 장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과학적 설명의 대상이나 후자는 소위 인문학적 이해를 위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에 내재한 행동의 장은 가치의 질서와 의미를 포함한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내포한다.
행동은 가치 지향적이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탐구해야 할 미지의 영역은 어머니 신, 자연 혹은 유한성에 대한 사색이며, 이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로 표현하면 ‘아직 아님(noch nicht)’이라는 희망의 영역이다.
반면에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가치 질서는 아버지 신, 억압된 문화, 조상의 지혜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개 인간 행동의 규점은 이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를 유교식으로 표현하면 ‘순천자존역천자망(順天者存逆天者亡)‘이다.
마지막으로 피터슨이 제시하는 영역은 위의 두 영역이 중재하는 신의 아들, 개인의 원형, 창조적 탐험가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억압된 문화 속에서는 적대적인 저항인처럼 나타난다.
인류는 객관적인 세계에 적응한 만큼 이러한 신들의 세계에 적응해 왔다. 인류가 이 두 세계에 적응해 왔다는 사실은, 세계가 실제로 사물의 공간일 뿐 아니라 행동의 장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미지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은 영웅의 영원한 숙적인 '사탄과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 곧 세상의 전부이므로 그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탄처럼 교만하다.
이는 전체주의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안다는 식으로 전지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이나 혹은 '이성'이 신의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하는 꼴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몰아간다.
'사탄과의 동일시'는 집단 정체성에 내재된 위험들을 증폭시켜 우리를 병적인 어리석음으로 몰아간다. 미지의 영역을 거부하는 치명적이고 끈질긴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의 관심사, 즉 인생의 주관적 의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개인의 관심사는 '탐험된 영토'와 '미탐험 영토'의 경계에서 드러나며, 개인과 사회가 환경의 변화에 계속 적응해 나가는 탐험 과정을 행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개인의 관심사에 충실한 사람은 순응을 요구하는 집단의 압력에 맞서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말씀이며 창조주라고 끝까지 주장했던 '구세주', 즉 영웅의 원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은 영웅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나아가 집단에 속하면서도 집단을 초월할 수 있다. (30-31쪽)
집단에 속하면서 집단을 초월하는 개인과 영웅의 동일시라는 피터슨의 제시는 심리학적이기보다는 이념적이다. 그의 이런 제안은 분석심리학의 한계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그가 제시하는 영웅적 투쟁 혹은 희생과의 가치와 개인적 행동과의 동일시는 자신이 이미 파레토의 삼각형의 상위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과연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아적 사명의 자각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험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동시에 진화적이며 동시에 창조적인 본성을 지닌 인류의 여정의 근원적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는 중재와 투쟁의 영역에서 어떤 의미의 지도를 발견했을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