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 2: 고대세계 2

토지 경영-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코스」

by 박종규

기원전 7~4세기에는 위대한 문학적 · 과학적·철학적 업적들이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세계의 본성에 관해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신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전이 크세노폰(Xenophon, BC 430-354)과 플라톤이 살았던 세계의 배경을 이룬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경제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경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정치사의 사실들로부터 유추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의 경제가 호메로스 시대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농경에 기반을 두고 있고 토지 소유가 부의 주요 원천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BC 4~7세기 동안에는 거대한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BC 594년 집정관 솔론(Solon)이 아테네에 도입한 개혁이었다. 이 개혁을 통해 귀족의 권력이 제한되었고, 유산계급 중에서 4백 명이 선출되어 평의회가 구성됨으로써 민주적 통치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토지는 재분배되고 법률은 성문화되었으며 은화가 제정되었다. 아테네의 상선단(merchantfleet)이 확대되고 무역이 확장되었다. 아테네인들이 상품, 특히 올리브유를 수출하고 그 대가로 곡물을 들여옴에 따라 특화된 농업이 발전했다. 이로써 자급자족이라는 오래된 규범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솔론의 개혁은 비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계급분열과 정치적 격변을 초래했다. 아테네와 여타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50년 동안 아테네는 기본적으로 평화상태였다. (31-32쪽)

솔론의 개혁은 그리스에서 발생한 민주제도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높은 이자를 감당할 수 없던 다수의 농민이 토지를 읽고 심지어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는 등, 농경제의 기초인 농민층이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난 까닭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고금리와 중산층의 몰락과 더불어 부의 양극화가 극심하게 된 것이다. 솔론은 먼저 노예로 전락한 농민을 자유인으로 회복함과 동시에 재산 등급에 따라 각각의 권리와 의무가 다른 네 가지 신분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시민들의 직접 정치 참여를 확대하였다.


해상무역을 확장함으로써 농경제를 특성화하였다. 그리스의 특산물인 올리브유는 수출하고 국내에 필요한 여타 곡물이나 재화는 수입하는 등 소위 무역을 통하여 지중해 연한의 경제권을 활성화하였다.


상선이나 선단 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해군의 역할이 중요시되었으며 경제권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해전이 발발하였으며, 살라미스 해전을 그리스 진영이 승리로 가져가면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주도적 폴리스가 되었다.

그 결과 페리클레스(Pericles)의 이름을 따서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부르는 대번영의 시기가 나타났다. 페리클레스는 BC 461-430년간 귀족에 대항하여 민주파를 이끌었다.


이에 따라 동지중해에서 해적질이 격퇴되고 무역이 융성하고 상업적 농업과 제조업이 발전했으며, 오늘날 상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활동, 즉 은행, 신용, 환전, 상품 투기, 독점무역이 나타났다.


한 역사가는 아테네에 대해 "르네상스 이전 시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복합적인 경제활동의 상업적 중심지"라고 썼다. 그 결과 나타난 번영을 기반으로 하여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 즉 아테네 혈통의 성인 남자 모두가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였다. 심지어 배심원단에 수백 명의 시민이 참여할 수도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소송을 좋아했고, 그래서 수사학(修辭學)을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존재했으며, 소피스트(sophist)들이 교사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직업적 지식인 (professional intellectuals)이라는 배경 속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가 나타났다. 소크라테스와 관련하여 두드러진 점은 ‘끊임없이 질문하기'라는 독특한 방법이다.


플라톤과 크세노폰 같은 유능한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끌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전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대화록과 크세노폰에 근거한다.


크세노폰은 아테네 상류계급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복했다. 몇 가지 이유 때문 그는 아테네를 떠났고, BC 399-394년간 그는 스파르타를 위해 싸웠고, BC 365년 아테네로 돌아가기 전까지 스파르타의 보호를 받으며 시골의 영지에서 살았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이 안정된 시기에 써졌다.(32-33쪽)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아테네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번영과 발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인구 몇십만도 안 되는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서구문명 나아가 현대문명의 기초가 되는 창의적 학문과 예술 그리고 정치와 문화가 짧은 시기에 발현했다는 사실은 인류사의 경이이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의 제자의 제자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알렉산더 대왕에 이르는 헬레니즘의 정립과 전파는 인류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더불어 크세노폰은 현대에서 경제학으로 불리는 영역에 대한 사유를 심화시켰다.

크세노폰 역시 생산자 계급이 아니라 귀족 출신이었고 영지를 부여받고 학문활동에 종사했다. 즉 그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소위 직업 지식인이었다. 그렇지만 학문의 분업화가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은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가지고 시대적 현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크세노폰이 쓴 저작의 제목인 '오이코노미코스 (oikonomikos)‘는 economics' (경제학)와 'economist (경제학자)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그러나 좀 더 적절히 번역하면 소유지 관리자(The Estate Manager) 또는 소유지 관리(Estate management)라 할 수 있다. 글자 그대로 '가계 운영 (Household Management)을 의미한다. 'oikos'는 가계'를 뜻하는 그리스어지만 확장하면 '소유지'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코스」는 사실상 농지 경영에 관한 논문이다. 권위를 발휘하기 위한 사람들에 대한 훈련과 자기 수양의 강조 같은 친숙한 소크라테스적 주제가 이 책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주요 주제는 효율적인 조직이다. 생산에서 인간적 요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강조를 생각하면 (아마 노예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효율적인 경영이란 효과적인 지도력으로 고쳐서 이해될 수 있다.


효과적인 지도자의 으뜸 요건은 전쟁이든 농업이든 관련 분야에서 유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크세노폰은 전쟁에서 얻은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는 이러한 원리가 모든 활동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효율성의 또 다른 요건은 질서였다. 크세노폰은 트라이럼 (trireme, 3단 노로 추진되는 갤리선)을 예로 들었다.


그 배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맡은 사람은 모든 것이 어디 있는지 잘 알았으며 그가 없을 때에도 물건 찾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러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조직, 관리되는 창고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훌륭한 조직이 생산성을 배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효율성에 대한 크세노폰의 강조는 단순히 현대적인 기업보다는 농업 소유토지에 적용된 관리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관리' (administrative art)이라는 개념은 이보다는 훨씬 더 넓은 국가 전체에서의 자원 분배에까지 확장된 것이었다. 그는 키루스 대왕(Cynus the Great)이 제국을 조직하는 방식을 논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관리들에게는 적절한 인센티브(incentives)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치자가 국가의 모든 일 - 방위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시장 메커니즘이 아니라 행정적 권위가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이룰 방법이었다.


크세노폰의 분업론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분업 (division of labour)이란 후대의 경제학자와 역사가들이 큰 관심을 기울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작은 마을에서는 한 사람의 일꾼이 의자도 만들고 문, 쟁기, 탁자를 만들어야 하겠지만, 그 일꾼이 이 모든 활동에 숙련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도시에서는 수요가 충분히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의 과업에 전문화할 수 있고 더 효율적일 수 있다. 토지로 되돌아가 크세노폰은 분업이 부엌에서도 실행될 수 있으며, 그러한 부엌에서 마련된 어떤 것도 한 사람이 모든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작은 부엌에서 마련된 음식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크세노폰의 모델은 시장을 매개로 한 인간 상호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을 자연에서 얻는 만큼, 생산의 효율성은 자연자원의 사용을 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의 세계에서 자연은 알려지고 이해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태적(靜態的) 세계다. 교역과 시장은 부차적이다.


이 시기에 아테네에서 무역과 상업이 발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호메로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대도 농업 토지가 중심이었다는 점은 아마 놀라운 일일 것이다. 이는 몇몇 당대 사람들에게 그의 이러한 설명은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35-37쪽)

글이 길어졌기에 위의 본문 요약을 다시 읽어보기 바라며 다음 편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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