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상국가
플라톤의 ‘공화국(Republic)’은 BC 5~4세기 아테네와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를 집어삼킨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여 이상국가(ideal state)의 청사진을 제시하기 위해 시도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의 경험을 통해 플라톤은 민주정도 참주정도 사회에 안정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민주정의 지도자들은 정의로운 일을 행하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이용하여 지지를 얻는 데 몰두한다고 생각되었다. 반대로 참주(tyrants)는 국가 전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것이며, 그렇다고 지도자 없는 세계는 카오스(chaos)에 빠질 것이다.
이 딜레마에 대한 플라톤의 해결책은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를 통치할 철인왕-수호자(guardians) -계급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지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철인왕으로 지명할 것이다.
이상국가에서는 그들이 철인왕으로서의 역할에 걸맞은 자질을 갖추고 그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훈육과 그들의 생활방식이 설계될 것이다. 수호자가 부패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지 않도록 보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심지어 금이나은 같은 것들은 아예 만지지도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임금(wage) 명목으로 생계에 필요한 것을 받을 것이다. 참주들과는 달리 이들은 국가의 이해를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이다.(37-38쪽)
플라톤은 이상적인 인간을 확대하면 이상적인 국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형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갖춘 정의로운 인간이다. 용기와 절제는 지혜에서 나오는데, 지혜를 사랑하는 자 즉 필로소포스(philosophos)가 바로 철인, 철학자이다.
정의로운 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소문자로 본다면 정의로운 나라 즉 공정하고 이상적인 국가는 대문자이다. 우리의 몸이 머리에 의해 지배받을 때, 특히 감정이나 의욕이 아니라 이성적 통제에 따를 때 정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지주의적 이상형의 인간을 모델로 국가를 설계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플라톤이 생각한 철인왕-정치이다. 이는 동양의 사상 특히 유가의 성인왕-정치와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일인지배를 원칙으로 하는 중국의 전제군주제와 달리 철인-수호자 계급의 지배는 일종의 정치적 엘리트 집단의 지배로 여겨진다. 그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런 집단을 양성하던가 아니면 기존의 왕들을 철학자로 만드는 것을 설파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결국 현실 정치가의 교육에 손을 떼고 후세를 위한 철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플라톤의 비전은 사회의 효율적 조직 - 합리적 원칙에 근거하여 조직된 정의로운 사회에 관한 것이었다, 희랍의 다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효율성을 생산에서의 인간적 요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천부적 소질에 적합한 활동을 전문화해야 하고 그에 따라 훈련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도시 (국가)들의 기원은 사람들의 전문화와 그들 상호 간의 의존에 있었다. 그는 신체적으로 타고난 자원과 기술을 당연시했다. 그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고정된 위치를 지니며, 이해관계에 초연한 통치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효율적인 행정에 의해 유지되는 정태적인 세계였다.
그가 교역의 역할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장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비재는 매매될 수 있겠지만, 재산은 시민들 사이에 (수학적 원리에 따라) 적절하게 할당될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시들이 소규모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있었다. 후기 저작에서 플라톤은 도시에서 최적의 가계 수가 5,040개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최적의 수인 이유는 그 수가 최초 10개의 정수에 의해 나누어지며, 따라서 최적 행정단위 수로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도시가 소규모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상은 농지와 자원의 가용성(可用性)에 제한을 받은 그리스 도시들의 현실과 일치했다. 인구가 증가하면 도시는 탐사대를 조직하여 식민지를 개척할 것이다. 이 식민지는 그리스적 생활방식이 유지되는 새로운 도시가 될 것이다. 이들 식민지는 모(母) 도시들로부터 종종 독립하게 되었으며, 지중해 전역, 특히 남부 이탈리아, 시실리, 북아프리카에서 나타났다.
플라톤은 귀족이었고 아테네의 공무(公務)에 관여했으며 군사적 원정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여러 곳을 널리 여행했으며, 이탈리아에 있던 피타고라스 공동체들도 방문했다. 그는 아마 여기서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시실리에 있으면서 시라쿠사의 통치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BC 367년에 디오니시우스 1세 (Dionysius I)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인 디오니시우스 2세를 지도자로 교육하는 일을 맡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BC 375년경 그는 정치가들을 철학자로 양성하기 위해 (아테네 외곽에 영웅 아카데무스를 기리는 숲에) 그 자신의 아카데미(Academy)를 설립했다. 플라톤은 좋은 정부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의 학생들 중에 많은 사람이 통치자가 되었으며, 플라톤은 아카데미의 과업을 그런 사람들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참주가 플라톤의 가르침에 따라 온건한 통치를 편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8-39쪽)
이렇듯 경제의 문제는 정치 혹은 통치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에 경제학과 정치학 그리고 나아가 윤리학은 분리될 수 없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태동되었다.
비록 고대의 경제학이 소규모의 영토와 인원을 바탕으로 한 재화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무역과 식민지를 통한 효율성의 제고라는 비교적 단순하고 정태적인 분할 구조의 설계에 머물렀지만 이 설계 자체는 정치적이면서도 윤리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정치경제학이란 용어가 근대에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정치는 경제를 그리고 경제는 효율을, 효율은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따로 경제학을 분류하지 않았지만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 속에서 정의의 문제와 동시에 교환과 분배에 관한 경제적 요인을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