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행복

분류: 사상

by 동욱

불행은 모든 것에 적응하는 괴물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돈'이 괴물을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무기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 믿음이 너무 강해서, 돈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돈이 답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돈이 부족해서 안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이 이미 충분한 돈이 있음에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이 괴물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돈을 좇습니다.
물론, 돈은 중요한 자극을 제공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돈도 자극을 주니까, 돈을 좇으면 안 되는가?
돈이 자극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오는 즐거움은 분명히 존재하며, 초기에는 그것이 큰 자극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자극의 효과는 줄어듭니다.
돈을 얻을 때 처음에는 큰 기쁨을 느끼지만, 재산이 늘어나면 더 많은 돈을 얻는 것에 대한 자극은 점차 줄어듭니다.
결국, 더 많은 돈을 쫓는 것은 비효율적이 됩니다.
이는 '이스탈린 역설'처럼, 일정 시점 이후 돈이 주는 자극의 크기가 미미해지는 현상입니다.

이스탈린 역설이란, 처음에는 증가하는 자극이 크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 자극의 효과가 감소하거나 무효화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처럼, 돈을 추구하는 것도 초기에 큰 자극을 주지만, 그 자극은 점차 약해지며, 결국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의 허들이 높아질수록 행복을 느끼기 어려워집니다.
행복을 느끼기 위한 '허들'이 높아지면, 행복을 경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반대로, 불행은 쉽게 찾아옵니다.
무작정 자극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행복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극을 추구하더라도, 그 자극이 효율적이어야만 합니다.

효율적인 자극을 얻는 방법은 자아연구 → 자아실현입니다.
즉, 자극을 무작정 쫓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자극을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아연구는 평생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변화하는 자신에 맞춰 적합한 자극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극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면, 허들을 불필요하게 높이지 않고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핵심 개념: 자아연구와 자아실현


우선, 자아실현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실현이란 ‘모든 선택을 나에게 맞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나대로 살려면 나를 알아야하고, 나를 알려면 나를 공부해야겠죠?

나에대해 공부하는 것이 바로 자아연구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철학적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와도 같은 의미죠


자아연구를 안하면 ‘나’를 모르고, 나를 모르면 남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남의 선택을 따라다니는 꼭두각시의 삶일 뿐입니다.


정답인 ‘나’가 아니라 ‘남’을 따랐기에 삶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물론 운이 좋아서 남의 방식이 나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우연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연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자신의 성향과 욕구, 능력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 채 타인의 기준이나 자극에 맞추어 살면, 결국 삶은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비효율적인 자극 추구 때문입니다. 나만의 기준을 세우려면,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자아연구 방법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되돌아본다.

그중에서 특별히 좋았던 기억과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려 정리한다.

각 기억을 분석하여 감정의 원인을 추적한다.

왜 그 기억이 좋았는지, 왜 끔찍했는지를 고민하며 가설을 세운다.

세운 가설을 일상에 적용해 본다.

실제 감정이 가설과 일치하는지 관찰하고 검증한다.

가설이 맞다면 더 깊이 탐구하고, 맞지 않다면 수정하며 계속 연구해 나간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자신의 감정과 행동 패턴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자아연구는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마치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듯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은 마치 불행이라는 괴물을 무작정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때로 운이 좋게 괴물의 약점을 겨냥한 '럭키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간혹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에 의존하는 삶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아연구는 괴물의 약점을 찾아내는 과정이고, 자아실현은 그 약점을 공략하는 과정입니다.
자아연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괴물과 싸우려고 하지만, 괴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여 결국 더 빨리 실패하게 됩니다.
괴물은 모든 공격에 적응하기 때문에, 단순히 약점만을 공격한다고 해서 완전히 물리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괴물의 약점이 강화되고, 자아연구와 자아실현의 효과도 점차 줄어들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결국 우리는 적응하고 무료해지기 마련입니다.
자극에 순식간에 적응하고 더 큰 자극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계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성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결국 적응하여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허들을 다시 낮추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의도적인 결핍'으로 허들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극을 낮추고 이를 유지해서 뇌가 그것에 적응하게 하는 것.
결핍을 유지하고 그것에 적응하게 함으로써 허들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허들을 낮출 수는 있지만, 결핍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혹은 의학이 극도로 발달하여 뇌수술로 허들을 고정시키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살아있을 확률도 낮고,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실패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윤리적, 도덕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멋진 신세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공허하게 살아야 하는가? 아닙니다.
자극에 적응하고 더 큰 자극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아예 허들을 없애는 선택지도 존재합니다.
허들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사상의 결론)
허들 0과 허들 無는 다릅니다.
허들 0은 허들이 존재하지만, 그 허들이 자극 0에 놓여있다는 의미이고,
허들 無는 아예 허들이 소멸했다는 뜻입니다.
허들이 없으니 "이걸 넘어야 행복하고, 이걸 넘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법칙이 무효화됩니다.
"이걸"이 없어졌으니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허들이 없어진 상태는 몰입을 통해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낚시, 사색, 명상 등 다양한 활동이 이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파사나 명상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위파사나는 특별한 준비물이 필요 없으며 언제 어디서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명상 능력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더 깊은 명상 상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는 허들을 소멸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허들이 소멸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해탈이라고 믿습니다.
해탈은 자아와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제약이 없는 상태이며, 이는 자극에 적응해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끝에 도달하는 무의 상태와 일맥상통합니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위파사나 명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파사나를 통해 허들이 영원히 사라질 가능성이 생깁니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허들이 쉽게 부숴졌다면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존재했겠죠.

몰입은 일시적으로 허들을 소멸시키지만, 해탈은 영원히 허둘을 소멸시킵니다.
명상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위파사나 명상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소멸시키고, 그 결과로 ‘허들’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결핍이나 고통 없이도 허들을 제거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으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합니다.
해탈이 실존하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수행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몰입 능력을 기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안정과 집중력 향상 등 실질적인 이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는 보기에 위파사나는 현재까지 인간이 실천 가능한 방법들 중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수행입니다.
몰입을 통해 자극과 반응의 간극을 넓히고, 나아가 자극 자체의 영향을 소멸시킴으로써 허들을 제거하는 잠재력이 존재합니다.
이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몰입(flow)’ 이론과 유사한 지점에서 교차하지만, 제 관점은 보다 원리적이며 ‘자극-허들 구조의 해체’라는 본질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습니다.

해탈의 실존 여부, 모든 생명이 불성을 갖는지, 혹은 위파사나 명상이 실제로 해탈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인지 등의 질문은 과학적 탐구보다는 믿음과 해석의 문제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탈을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경지로 이해하며, 명상 중에 발생하는 환상적 경험이나 비정상적 지각 현상들은 일시적인 뇌의 작용일 뿐,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그러한 체험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특정 종교에 귀의하지 않은 유물론적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서, 석가모니의 사상 중 일부를 제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하고 있습니다.
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해탈은 허들의 소멸이며, 모든 번뇌와 괴로움이 제거된 정신적 평형 상태입니다.
업, 윤회, 신적 존재와 같은 초자연적 개념은 믿지 않으며, 해탈은 실제로 존재 가능한 심리적·신경학적 상태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위파사나 명상을 통해 해당 상태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석가모니가 행한 수행과 현대의 위파사나 명상 사이에는 구체적 기술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본질적인 흐름과 효과는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해탈은 신적 초월이 아니라 신경과학적 조건 위에 성립된 상태이므로,
뇌 손상이나 치매 등으로 인해 그 상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탈을 경험했다고 해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여전히 신체적 제약을 가진 존재입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6화비교와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