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생각

분류: 사상

by 동욱

지금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가 경계했던 우상숭배와 기복신앙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할 때가 많습니다. 깨달은 인간에 불과한 석가모니를 신으로 만들어 기도하고 의지하는 모습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라 여겨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큰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부처님 말씀’이라 믿는 경향은 다소 우려스럽습니다.

물론 저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도 결국 경전에서 현실적이라고 판별되는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업보나 윤회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집착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현실적인 인간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비현실적인 가르침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십사무기나 독화살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비현실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아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수행법을 제시하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심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말한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라는 가르침은 그를 신격화하고 기도나 소원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모습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만들어 기도하는 것 자체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 여겨집니다. 석가모니는 이미 죽고 없는 인간이기에 그에게 기도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수많은 번역자와 문화적 맥락을 거치면서 변질되거나 추가·삭제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온전히 걸러내는 방법은 없으며, 결국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해탈은 영적인 개념이 아니라 뇌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뇌에 손상이 일어나면 해탈 상태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해탈을 경험했다고 해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신경과학적 한계를 가진 인간일 뿐입니다.

석가모니는 고통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실용적이며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불교의 신화적인 부분은 석가모니의 위대함을 왜곡한다고 느낍니다. 석가모니는 그저 위대한 인간에 불과한데 그를 신처럼 대우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과 같은 급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화살의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누가 독화살을 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독화살을 뽑아낼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질문들은 매우 흥미롭지만, 고통을 해결하는 데 있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는 있겠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석가모니는 복잡한 불교 용어로 이론적인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용적인 명상법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지도해주는 인물입니다.

해탈의 가능성을 인공지능이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흥미롭지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해탈을 원한다면 결국 나 스스로가 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니 콜먼이 운동한다고 내 몸이 근육질이 되지 않듯, 인공지능이 수행한다고 내가 해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도 아니고, 법칙을 무시하는 초능력자도 아닙니다. 부처는 그저 ‘깨달은 인간’입니다. 부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진 못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다치고 죽습니다.

부처는 석가모니만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든 수행을 통해서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부처가 하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에게 기도하고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해탈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석가모니는 금수저가 맞지만, 그가 안전하고 편한 집에서 대충 망상하며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후에 왕이 될 왕자의 자리와 집, 가족, 돈을 모두 버리고 출가해서 몇 년간 온갖 고행을 하다가 고행이 아닌 중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하여 해탈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도 ‘나 부처다’ 하고 꺼드럭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행법과 해탈의 개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였어도 출가하고 해탈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금수저보다 흙수저가 출가하기 더 쉬울 것입니다. 자극과 허들, 허들이 높고 가진 것이 많은 금수저와 버릴 것이 몇 없는 흙수저 중에서 누가 더 출가가 쉬울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죠.

그러니 “석가모니는 금수저였으니까 나는 못 해”라고 하지 말고 수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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