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에 대한 기억과 용서, 그리고 새로운 미션
누구나 그러겠지만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잘못들이 있다.
고해성사를 보았고 미사 때에도 '내 탓이오'를 수없이 되뇌었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잘못했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직접 또는 마음으로 용서를 빌어도, 마치 켈로이드 피부에 생긴 상처처럼 도드라진 기억들이다. 어떤 것들은 조금 희미해지는 듯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억력 감퇴가 두드러진 요즘의 나의 두뇌도 지울 수 없는 자국으로 남아 수시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런데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던 내 마음을 산뜻하게 말려주는 산들바람 같은 이야기를 얼마 전 미사 강론에서 들었다.
신부님의 강론은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천국에 가고 싶으시죠? 제가 여러분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천국문을 누가 지키고 있죠? 맞아요. 베드로가 지키고 있죠. 베드로에게 이 한 마디만 하면 베드로가 천국문을 열어준답니다. 세 글자인데, 뭔지 아세요?"
신부님이 잠깐 말을 끊었지만 다들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다.
'제발요? 어서요? 베드로? 아저씨~? 뭐지?'
이것저것 세 글자 단어를 머릿속에서 찾아보았지만 딱히 그럴싸한 것이 없었다.
신부님은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아무도 모르시네요. 베드로 성인이 천국문을 바로 열도록 하는 단 한마디는 바로 이겁니다. '꼬끼오!'"
"풉!"
너무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쳐다볼까 봐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드로 사도는 생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죽더라도 끝까지 따르겠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죠. 근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알려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꼬끼오!' 그때 베드로는 잘못을 깨닫고 도망쳐 울었습니다. 나중에는 베드로를 놀리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보면 '꼬끼오'라고 하기도 했죠. 그가 천국문을 지키면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지 보려고 하는데, 들어가려는 사람이 '꼬끼오'라고 하면 그도 잘못을 저질렀던 적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웬만하면 그냥 들여보낸다는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놀린 것까지야 성경에 있지 않지만, 충분히 그랬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베드로를 움직이는 말이 그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거라니, 재밌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베드로 성인은 죽어서도 고생한다 싶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딱 잡아뗄 때를 살펴보자.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정황이란 게 있지 않았겠나.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붙잡혀 대사제의 집으로 끌려간 직후였고,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체포에 당황한 제자들을 대표해 베드로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파악하려고 대사제의 집 뜰에 슬쩍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추종하던 리더가 불시에 붙잡혀서 도대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가늠하기 위해 남의 집에 들어가 있는데, 누가 자신을 알아보아 이목이 집중되면 계속 거기에 있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자신 또한 붙잡혀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일단 예수님과 상관없는 척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뭐였 건 간에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하고 세 번을 부인했는데 마침 그때 닭이 울었다. 성경의 네 개의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모두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고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베드로는 밖으로 나왔고, 후회했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다시 신부님의 강론으로 돌아가보자.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기억이 베드로에게는 사무치게 부끄럽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게 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질문과 답을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전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정했었지만,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답할 때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미션을 주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가 과거에 매여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띵했다.
전능하신 구세주라는 분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감추고 싶은 잘못을 과거로 돌아가 없애주시거나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해서 없던 일로 만들어주시는 일을 하신 게 아니다. 네가 뉘우쳤고 네 본심을 내가 알았으니 없던 일로 해 주겠다, 하지 않으셨다.
네가 이전에 저지른 실수를 내가 알고 있지만, 그걸 따지려는 게 아니다. 네가 뉘우친 걸 이미 내가 알고 있다. 지금 네 마음은 어떠하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앞으로 나의 일을 하여라.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이야기하신다는 거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마무리 멘트 또한 사람들의 웃음을 불러왔지만, 그러면서도 생각할 지점을 분명하게 던져주셨다. "예수님은 저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죄책감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과거에 매이기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더 신경 쓰도록 이야기하십니다.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을 보지 말고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라'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그만큼 크고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워지지 않는 잘못에 대한 기억에 매이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집착인 것 같다. 이미 행해진 잘못이 없어지지 않고 기억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그런 생각에 잠식당해 더 중요한 일을 놓친다면 잘못의 반복된 고백도 뉘우침도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과거의 내 잘못들이 자꾸 되뇌어질 때마다, 난 왜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언제까지 이 잘못들에 매여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 강론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지나간 잘못 자체를 없앨 수 없다.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 또한 내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매이지 말고, 그냥 지나가자.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가 아닌 것처럼, 미래의 나를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상태 그대로 유지하지 말자. 더 나은 내가 되어 해야 할 일을 하자. 베드로도 그랬는데.
깊은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미션을 받은 베드로가 매일 같은 잘못을 되뇌며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 하며 주저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더 겸손해지고 더 용감해지지 않았을까.
근데 나는 베드로 할아버지를 만나더라도 '꼬끼오'는 안 하고 싶다. 내 허물도 많은데 남의 약점을 찌르는 건 좀 비겁한 것 같아서. 근데 그 비기를 쓰지 않고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무진장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될랑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