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나의 클레멘타인

by 조엘

| 갑작스러운 발병 소식 |


아버지가 뇌에 종양이 생겼다고 처음 알린 사람은 나였다.


언니도 나도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가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아빠가 나를 방으로 부르시더니 몇 달 전에 쓰러진 것 때문에 이것저것 검사를 했더니 머리에 이만한 종양이 발견됐다고 하더라,라고 하시며 아빠의 크고 굵직한 둘째 손가락을 통째로 가늠하셨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가지 버전의 반응이 머릿속을 스쳤다. '뭐라고요? 말도 안 돼요!' 하며 오열을 하는 것, '어, 어떻게... 아빠, 이제 어떻게...' 하며 흐느끼는 것, 아빠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짜예요?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사시느라 몸을 안 돌봐서 그런가? 내가 아빠한테 너무 신경 안 쓰고 잘못해서 그런가? 우리 다시 검사해 봐요. 어떻게 갑자기 그럴 수가 있어요?'라고 위로하는 것 등등.


무엇보다 드라마에서처럼 아빠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보며 아무 말 없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눈물을 참지 않고 흘리는 것이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아빠가 얼마나 놀랐을 것이며, 우리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할지, 앞으로 병인과 관련하여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해 얼마나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떠올랐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 시간만 흘렀다.


드디어 아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너는 내가 아프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냐?"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나마 식구들 중에서 아빠와 가까웠는지 모르겠지만, 아빠와 감성적인 대화나 일상에 관한 대화를 별로 한 적이 없고, 아빠가 나에게 토닥여주거나 하는 스킨십을 한 기억도 없기 때문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색했다. 그러면서도 아빠에 대한 연민과 슬픔과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에 대한 막막함이 한꺼번에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은 날들이 좋은 날들보다 많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말하는 방식도 서로 달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서로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아빠는 화가 많은 편이라 말과 행동이 거칠었고 엄마는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의사 표현을 잘 안 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을 많이 쓰다 보니 서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가 사이가 안 좋아지면 더 큰 문제는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편 가르기를 유도한다는 거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화량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엄마가 언니와 나와 더 가까웠을 것이다. 적어도 아빠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 언니와 내가 모두 외국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빠는 점점 더 고립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작은 사업을 하셨던 아빠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족에게서 받아야 하는 사랑과 지지가 부족해서였는지, 점점 더 외로워 보였고 그것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결국에는 뇌종양이라는 병이 생겼다.


부엌으로 가서 아빠의 청천벽력 같은 발병 소식을 엄마에게 전했다. 엄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연신 부정하셨다.


아빠는 평생 감기 한번 앓지 않으셨던 분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추위를 많이 타고 감기를 달고 살았던 것과 달리, 아빠는 열이 많고 건강한 체질이어서 한겨울에도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깨우셔서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겨울에도 내복은커녕 외투도 안 입는 경우가 많았는데, 양복을 잠그지 않아서 가슴과 배 가운데 부분은 셔츠 한 장이 그대로 보이는데도 추운 티를 내지 않으실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아빠 친구분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차를 타려고 하는데 그냥 쓰러지셨다는 거다. 체질로 보면 고혈압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단을 받은 적도 없었고, 그런 증상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후 이런저런 검사를 하셨는데, 머리에서 종영이 발견된 것이었다.


엄마와 같이 병원을 몇 번 다시 갔다 오셔서는 가족회의가 열렸다.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건지 말건지에 대한 것이었다. 종양이 이미 크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종양은 점점 커져서 종국에는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텐데, 그 속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수술을 한다면 잘 될 경우 깨끗이 나을 수 있지만 잘못된다면 어느 부분을 잘못 건드리느냐에 따라 말을 못 하거나 거동을 못하는 등의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확률도 알 수 없는 게임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직 인생 경험이 적은 학생이었던 나나 언니는 두 가지 시나리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을 깊이 생각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큰 의사결정을 잘하지 않으려는 엄마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으셨고 결국에는 아빠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냐는 원칙만 고수하셨다.


몇 주를 같이 고민해도 이야기는 빙빙 돌았고, 아빠는 결국 수술을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문제는 만약 수술이 잘 되지 않아서 아빠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거나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대비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현실이 될까 봐, 누군가 너는 그런 상황을 왜 생각하냐며 비난할까 봐 두려워서.


| 아버지의 마지막 1년 |


수술은 실행되었고 종양은 없어졌으나 아빠는 언어 영역에 문제가 생겼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대비책까지 준비하지 못하고 수술을 한 것은 성인으로서 의사결정을 직접 한 아빠의 실책일 수 있지만, 느리게 죽어가는 것보다 적극적인 치료를 시도해 보는 것이 후회가 적지 않겠냐고 말했던 나 또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빠가 나를 믿고 아프다는 사실도 제일 먼저 얘기해 주셨는데, 내가 젊은이의 치기로 너무 가볍게 말한 것은 아닌가, 수만 수억 번을 다시 생각해 봤다.


아빠는 수술 후 반년 정도는 말이 어눌해지고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다른 말이 튀어나와서 답답해하셨는데, 그 이후로는 전반적인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언니와 나는 편찮으신 아빠를 곁에서 간호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것도 죄송했고 힘든 병간호와 사업 관리를 엄마가 다 하셔야 해서 너무나 죄송했다.


큰 부자가 아닌데도 아빠는 항상 머릿속에 있는 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하시며, 공부를 하려거든 그건 최대한 지원해 주겠다고 하셔서 어렵게 간 유학이었다. 아빠가 누워계시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잘 마무리하는 게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고 슬픔을 누르며 버텼다.


아빠의 발병을 알게 된 것이 3학년 1학기를 마친 겨울방학이었는데,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가보니 아빠는 움직이는 것도 둔해지셨고, 의미 있는 대화는 이미 어려웠다. 4학년 1학기인 가을학기 중에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추수감사절이 있는 주간에 잠깐 집에 왔는데, 그때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계셨다.


아빠의 병세가 회복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점점 확실해지면서 나는 기도의 방향을 바꿨다. 빨리 회복하시라는 기도는 이제 그만두고, 남은 날들이 덜 고통스러우시기를,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실 때 임종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아빠의 병세를 봤을 때 아무래도 그날은 그해 겨울이 될 것 같았다. 미국 학교들은 겨울방학이 길어야 3주 정도 되는데, 혹시 이때가 아닌 학기 중에 돌아가시면 한 학기를 날리고 다시 다녀야 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의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었다.


간절한 기도를 매일 드리던 중 하루는 너무나 생생한 꿈을 꿨다. 꿈에서 누군가 나에게 아빠가 돌아가시는 날을 알려준 것이다. 그게 몇 월 며칠이라고 알려준 것은 아니고,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전 며칠이 될 거라는 식이었다. 꿈을 꾸면서도 그 날짜를 계산해 보고 그러면 1월 초 어느 날이겠구나 하면서 안심하였다. 꿈에서 깬 다음에도 그날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몇 번을 되뇌었다.


| 죄책감 |


방학을 하자마자 집으로 왔다. 엄마에게서 아빠의 병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계속 전화로 들었지만, 의식이 없는 아빠를 보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급격히 안 좋아지시는 아빠를 병원에 모셨다가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여 다시 집으로 모셨다. 다음날 동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서 마지막 진찰을 하고 콧줄을 뺐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빠는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셨다.


병을 알게 된 후 1년이 지난 때였고, 아빠의 60번째 생신 한 달 전이었고, 희한하게도 내가 꿈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임종을 지켰고, 힘들었지만 장례를 치렀고, 나와 언니는 삼우까지 지낸 후 개학 날짜에 맞춰 학교로 돌아갔다.


그 후 엄마는 아빠의 사업을 정리하시느라 2년 가까이 고생을 하셨는데, 아빠가 구두로든 자료로든 현황을 알려주신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누가 나타나서 내가 이만큼 투자했었다, 내가 이만큼 돈을 빌려줬었다, 하면 사실 확인을 할 방법이 없었다. 영세한 사업체였기도 했고, 30여 년 전의 일이라 요즘 같은 시스템도 없었던 터였다. 그걸 하나씩 정리하고 사업체도 매각하였다.


엄마가 남아있는 일들로 고생하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아빠를 보내드리는 과정은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빠의 임종을 지킬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고,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으셨고,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장례도 끝났다. 절차적으로는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인생에 불면증이 찾아왔다.


딸밖에 없다고 없수이 여기는 아빠의 친구와 지인들, 친가 친척들 앞에서 약해 보일까, 간병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장례를 치르고 현실과 싸워야 하는 엄마 마음에 누가 될까, 의식적으로 덤덤하고 강한 척하며 몇 주를 지내고 나니, 말도 못 할 허전함, 허망함, 아쉬움, 뉘우침 등이 몰려왔다.


그때, 아빠가 아프다고 처음 얘기했을 때, 내가 아빠 손이라도 잡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 아빠가 투병하는 기간 동안 마음이 덜 외롭지는 않았을까. 아빠가 소통이 잘 안 되더라도 전화를 좀 더 자주 하고 일방적이더라도 내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해 드렸더라면 좀 더 웃으시지 않았을까. 누워계실 때 의식이 있든 없든 소리 내서 기도를 하고 항상 우리가 아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렸으면 아빠 마음이 좀 더 평안하지는 않았을까.


무뚝뚝한 성격에 간혹 폭력적이 까지 했던 아빠의 말투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내가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것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내 생각과 감정을 제 때에 표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간혹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있을 때에는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고도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꽤 오래갔다.


간신히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다행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식에 맞춰 엄마가 오셨다. 몇 달 만에 다시 모인 세 모녀는 애써 밝게 지내려 했다. 아빠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마치게 되었으니 슬퍼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웃으려고 애썼다.


| 그리운 아버지, 나 잘하고 있어요? |


시간은 여전히 계속 지나갔고, 이제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의 시간이 내가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빠가 안 계시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나의 기억과 나의 성격과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었기 때문인지, 항상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아가신 후 아빠를 생각하면 여러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상하게도 짧았지만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더 많다. 그중 하나는 내가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쯤 아빠가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언니가 피아노를 치고 아빠가 그 옆에 서서 재미있는 제스처와 함께 흥이 넘치게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부르시고 엄마와 나는 그 옆에서 아주 신이 나서 따라 불렀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원래 이 노래는 아빠가 사고로 잃은 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지만, 우리는 가사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가 지금 우리와 같이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한다는 것이 너무 좋고 재미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강렬한 행복감이 아빠와의 기억을 좋은 쪽으로 상당히 왜곡시켜 버렸다. 이런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처음에 가졌던 죄책감과 아쉬움은 조금씩 옅어졌고 그리움만 남았다.


몇 년 있으면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나이가 된다. 자잘한 애정 표현은 못하셨지만 평생 묵직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사셨던 아빠, 왜 그리 빨리 가셨을까. 든든한 백이 되어주셨던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잘 살고 있나, 아빠가 나에게 해 주려고 하셨던 것들을 나는 내 아이들에게 충분히 해주고 있는 걸까, 자꾸 돌아보게 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큰 위로를 받은 대사가 있다. 먼저 돌아가신 분에 대한 슬픔과 자책에 너무 빠져있지 말라고, 열심히 사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주인공 지은탁이 말한다.


"남은 사람은 또 열심히 살아야 돼요. 가끔 울게는 되지만 또 많이 웃고 또 씩씩하게. 그게 받은 사랑에 대한 예의예요."


아빠, 저 예의 잘 지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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