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무시하는 것은
오늘을 부정하는 일이다

재래식 교육

by 지금

나를 홀로 서게 만들고

홀로 걸을 수 있게 만들고

홀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홀로 참고 견딜 수 있게 하고

홀로 극복할 수 있게 하고

홀로 일어설 수 있게 하고

홀로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어제'의 힘이다.


'어제'를 거치지 않는 삶은 없다.

'어제'는 오늘의 토대고, 오늘은 '어제'의 결과다.

'어제'를 외면하는 일은 오늘을 부정하고 오늘의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다.


'어제'는 버려야 할 쓸모없는 그 무엇이 아니다.

'어제'를 버리는 일은 곧 자신을 버리는 일일테니 말이다.





재래식 교육


“아이고, 아직도 이런 거 쓰세요?”

“소리는 나요?”


10여 년쯤 된 전자기기에 대한 주변의 평이다.


옛것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낡고, 케케묵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게 언제 적 얘기예요.”

"그건 꼰대적 생각이죠."


물건만이 아니다. 방식도, 사고도 회의의 대상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예전’이라는 말이 붙는 말은 왠지 서글프다. 이미 신식에 밀려날 운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예전’의 것은 구식, 구형이라는 새로운 딱지가 붙는다.‘예전’은 효율적이지도 않다. 불편하기조차 하다.‘예전 것’의 생존 확률은 매우 낮다. 새로운 방식의 삶을 방해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재래식 교육’은 적폐가 되었다. 최첨단을 손에 쥐고, 10년 20년 후를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 내놓아서는 안 될 폐습이다. 재래식 옷을 입고, 재래식 몸짓과 재래식 언어로, 세월을 두텁게 뒤집어쓴 채 재래식 생각을 늘어놓는 ‘예전’ 선생이 눈총을 받는 이유이다.


학교에 첨단 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재래식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불편함과 비효율이 주된 이유다. 교사의 입에 의존하는 수업방식은 재래식이다. 교육적 효율이 낮아서다. 파란 칠판, 흰 분필도 시대의 간두에 서 있다. 첨단 기기를 활용해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한다. 최첨단 기기를 활용해 만들고 그려야 한다. 재래식 교사의 입 그리고 손과 발은 이미 유효기간을 넘었다. 효율적이지 않다. 교육적 효과가 적다. 그것도 오래전에 내려진 판결이다.


그러나 불편함과 비효율 그리고 비능률이 배척해야 할 이유일까. 불편하고 효율이 떨어진다고 교육적 효과가 없을까. 전자 톱이 효율적일 수 있으나 재래식 톱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분명히 있다. 편한 샤프 대신 자신의 손으로 깎은 연필을 쥐고 쓰는 것도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보고, 찍고, 그린 아이들의 발품 판 작품이 화면에 비췬 장면을 편히 보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그것만이 지니는 교육적 의미 또한 크다.


“책/아름다운 책/작은 삼림/한 장, 한 장/네 종이에선/목재의 맑은 향기가/퍼져 나온다./이른 아침/너는 곡식이며 바다다./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의 「책에 부치는 노래」중 일부다. 그는 책에서 나무의 촉촉함을 맡았다. 곡식의 풍요함도 느꼈다. 바다의 비릿함도 전한다.


종이책은 불편함을 구실로 전자책에 밀리고, 연필을 깎는 수고로움을 샤프가 대신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과 수고로움 자체가 교육적일 수 있다. 자신의 손으로 연필을 깎고, 노트에 적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목재의 향을 맡고, 소리를 듣고, 기록하고. 이것이 전자책과 샤프가 대신할 수 없는 교육적 의미고 가치다.


신식과의 거리가 교육과의 거리를 말하지는 않는다. 구식이라고, 새로운 시대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재래식 교육이 낯설고 색이 바랬다고 교육의 의미마저 구식이고 색이 바랜 것은 아니다.


첨단은 추구해야 한다. 아이들의 삶을‘옛것’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재래식이 퇴치해야 할 퇴폐인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쓸모마저 지우는 것은 아니다.‘옛것’ 중에는 간직해야 할 것이 분명 있다. 교실로 첨단이 물밀 듯 밀려온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움으로 덧칠된다. 그러나‘첨단’,‘새로움’이 반드시 교육을 첨단에 올려놓고 아이들의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도 당시 첨단기술이던 문자에 기억을 과의존할 때의 위험을 말했다. “기억을 내부보다 외부 기호에 의존하면 사람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것이며 실제론 무지하다 해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무지하여 함께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니, 지혜로워지는 대신 지혜로워 보이게 된 탓이다. 그들은 지혜 대신 자만심으로 가득 차 사회에 짐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첨단에 밀려 버려지는 옛것을 볼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경고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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