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꽃이 될 수 없다.

다른 꽃이 있기에 코스모스가 있다

by 지금

코스모스가 지천입니다.

몇 해전 아내가 집 앞 작은 터에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코스모스는 위력을 더해갑니다.

다른 꽃들을 밖으로 밀어냅니다.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힙니다.

그 위세가 당당합니다.

다 같이 연결된 관계인데도 코스모스는 다른 꽃을 인정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꽃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밀려 결국 자리를 잃었습니다.

코스모스가 다른 꽃을 계속 밀어내면서 모든 꽃의 터전이었던 밭은 코스모스차지가 되었습니다.


코스모스는 다른 꽃을 껴안으려는 마음도 다른 꽃을 초대할 생각도 없습니다.

코스모스에게 ‘함께’를 말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분홍빛 코스모스에게서 냉랭하고 날카로운 서릿발 기운이 불어옵니다.


코스모스는

다른 꽃에 무엇인가를 행하면 그것이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다른 꽃이 있기에 코스모스가 있다


아내는 꽃을 좋아합니다.

어딜 가든 꽃집은 당연히 거쳐야 할 필수코스이고 꽃에 붙은 눈은 좀체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결국 하나를 품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특별히 아내의 사랑을 받는 녀석은 코스모스입니다.

‘와’ 입을 벌어지게 하는 모습도, ‘어쩜!’ 감탄을 자아내는 색깔도, ‘흐~음’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향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한참을 머물도록 발길을 붙잡지도 못하는, 꽃이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아까운, 두 번은 고사하고 한 번에도 질리는, 적어도 내게는 별 볼 일 없는 시골 둑길조차 거부할 존재지만 아내에게는 인생 꽃입니다.


아내는 어디든 틈만 보이면 코스모스를 심습니다. 집 주변도 코스모스가 장악한 지 오래입니다. 어느 해 뿌린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운 이후 해마다 떼를 지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한 이후 다른 풀들은 삶의 터전을 읽었습니다.


아내의 일방적 사랑을 등에 업은 코스모스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위로 옆으로 무한정 힘을 뻗습니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키에 장사급 씨름선수의 몸을 연상케 하는 울퉁불퉁 덩치의 코스모스는 작은 풀들을 사정없이 짓누릅니다. 다른 풀들은 코스모스의 포악한 등쌀에 얼굴 한번 들지 못한 채 기가 죽어 바닥을 깁니다.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저 녀석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내가 집을 비운 겁니다. 친구와의 만남으로 좀 늦을 거라는 미안함이 담긴 그러나 제게는 기쁜 소식을 남기고 양껏 꾸민 몸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심장이 뛰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지요. 아내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잽싸게 창고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웃 동네 장날 날카롭게 날을 세워두었던 낫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온몸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며 작은 풀들을 짓밟고 있는 코스모스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잘라댔습니다. 한 놈 두 놈 자르고 또 잘랐습니다. 바람과 햇빛을 독점하고 높푸른 하늘의 기운마저 홀로 만끽하며 의기양양 뻗은 가지들을 중죄인 처단하듯 계속 처댔습니다.


칼 춤추듯 한참을 그렇게 낫을 휘둘렀습니다. 그제야 열악한 바닥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몇 포기 풀들이 드러났습니다. 녀석들은 처음 받아보는 따스한 열기에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아내의 화를 예상은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3일이나 지났지만 아내의 씩씩거림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밥도 설거지도 어느새 내 몫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주방 출입을 거부하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즐겁습니다. 적어도 속으로는 기쁩니다. 말 없는 아내가 두렵지 않습니다.


코스모스에 묻혔던 작은 풀들의 연푸른 빛깔이 이뻐서입니다.

작은 대공에 매달린 동글동글 꽃의 상큼한 향이 고와서입니다.

참았던 숨을 원 없이 들이키며 작은 바람에 몸을 내맡긴 가녀린 몸짓이 귀여워서입니다.


이제 코스모스가 지배하는 시절은 끝났습니다.

코스모스는 여러 꽃 중의 하나의 꽃이 되었습니다.

밭은 모든 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모두의 터로 변했습니다.

풀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허용하는 민주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라진 아내의 웃음꽃을 되살리는 문제가 남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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