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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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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Nov 05. 2023

삶은
시간을 몸에 새기는 일이다

시간의 자국

시간은 약속합니다.     


내일

오늘을 견디면 환하게 밝으리라.

행복한 순간은 반드시 돌아오고 확장되리라.

이루지 못한 소망에게 다시 기회가 되리라.     


시간은 약속합니다.     


내일

충족되지 못한 위대한 열망들이 불타오르리라. 

삭막한 삶을 뒤엎고 새로운 삶이 전개되리라.

포기했던 야심이 다시 일어나리라.   

  

그 약속은 유효한지요.  


   



시간의 자국    

 

‘9시’

아내는 이미 잠 삼매경입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자리를 파고들던 아내였는데 언제부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부쩍 빨라졌습니다. 그것도 앉은자리가 잠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졸다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피곤이 얼굴 곳곳에 진득하게 묻어있습니다. 쓰러진 아내는 하루의 고단함을 힘겹게 토합니다. 토해내는 고단함조차 피곤에 떨립니다.     


어느새 이리되었는지 몸 곳곳에 시간의 흔적이 선명합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시간이 켜켜이 검질기게 쌓여있습니다.    

  

구겨지고 접히고 처진 아내에게서 30여 년 전 아내를 봅니다. 

‘어느새 이렇게…,’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납니다.      


“다음 날을 허락하신 신들에게 감사하며 살라.”는 세네카의 말에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너에게 일어나는 일이 네 뜻대로 닥치기를 바라지 말라”는 에픽테토스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보다 더 지친 내일의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가져다줄 시간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내일을 맞고 싶습니다. 사막이 바람을 거부하지 않듯, 그래서 매 순간 새로운 아름다움을 덧입듯 매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시간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내일은 결코 오늘보다 헐고 삭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오히려 거칠고 모난 곳은 다듬고 불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고 과한 것은 억누르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 감탄하는 마음을 되찾게 해 완전함을 부여하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따질 일이 아니라고, 시간은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경탄케 하고 이미 습득한 것에 안주하려는 태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언제나 정성을 기울여 삶을 보호하고 돕는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내의 이맛살에 선명히 박힌 시간의 톱날에 야속한 마음이 들고, 고단함을 토해내는 아내의 숨소리에 눈물이 고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내려앉은 몸뚱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튀어나오기를 기대하고 어떤 실수도 판단도 감정도 관점도 소망도 필요하고 허용한다는 시간의 약속이 왠지 헛일처럼 여겨지니 말입니다.    

 

오늘도 거칠게 몰아친 시간에 지친 아내는 일찌감치 내일을 접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늘도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렇게 쓰러졌습니다.  

   

아내의 지친 몸이 깰까 살포시 이불을 덮습니다.

꿈에서라도 싱그럽고 아름답고 편안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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