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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Nov 18. 2023

부모는
다른 형태로 머문다

시어머니의 유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던 말길도 향했던 발길도 멎었다.

맞대던 눈길도 접하던 손길도 멈췄다.     


목소리는 흔들렸고 길을 잃은 발길은 휘청였다.

세상 모든 것이 눈물에 휘었고 손길이 닿는 것마다 떨렸다.     


시간은 빠르게 부모의 흔적을 지웠고 상처와 아픔을 치유했다.

주인 잃은 물건은 쓸모를 잃은 채 버려졌고 주인 잃은 공간은 새 주인을 맞았다.

삶을 헤집은 상처도 아물었고 심장 안에 머물던 아픔도 가셨다.     


어둑했던 얼굴에 빛이 들고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고 눈물에 잠겼던 목소리가 돌아올 때쯤 

집안 어둑한 곳에 박혀있던 부모님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언제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물건들 그래서 잊혔던 물건들, 반갑고 정겹다.   

  

부모님의 물건은 웃음이 마르고 한숨이 삶을 감쌀 때 위안이 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따뜻한 힘이다.   

  

부모님은 떠나지 않는다. 

자식이 있는 그 자리에 언제나 계신다.

자식이 있는 그 자리가 부모의 자리다.     


     



시어머니의 유산     


재봉틀, 항아리, 놋그릇, 사기그릇, 냄비….     


어머니가 남기신 물건 목록입니다. 아내에게는 시어머니의 물건인 셈입니다. 대단한 건물이나 어마한 땅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난하기 그지없습니다. 찌그러지고 헐렁이고 빠지고 뜯어지고 본색은 간데없고 … 드러내는 것조차 창피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아내의 손길은 언제나 사랑스럽습니다.     


‘시(媤)’자만 들어가도 몸서리친다는 말은 적어도 아내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온 아냅니다.

유산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가난한 시댁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주변의 물려받은 땅 이야기에도, 

물려받은 건물과 그 건물에서 거두는 수익 이야기에도 아내는 그저 웃을 뿐 그 어떤 시샘도 얌심도 부리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땀으로 거둔 것에 만족합니다. 

부모의 삶에 기대는 삶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부모님의 삶만 간직하려 애씁니다.

가난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일지언정 부모님의 물건을 소중히 챙기는 까닭입니다.

부모의 흔적이 지워질까 부모의 삶을 해칠까 염려해서입니다.     


삐걱대는 재봉틀을 돌리고, 항아리엔 장이 가득하고, 놋그릇엔 자신의 소품을 담고, 그릇과 냄비는 당당히 그릇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건의 가치를 따지자면 따지는 것이 수고롭습니다.

따질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부모님의 삶입니다.

부모님의 아픔이고 수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만든 힘입니다.     


아내는 어머니가 남기신 물건을 마치 어머니를 대하듯 마주합니다.   

   

대단하지 않은 물건을 대단하게 사용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대단합니다.     


그런 아내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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