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내와 다툰다
필요가 사라진 존재
한물간 존재
유효기간이 지난 존재
삶의 의지가 없는 존재
생의 가치를 잃은 존재
쓸모를 잃은 존재
자격 없음을 스스로 규정하는 존재
게으른 자아에 굴복하는 존재
삶을 버틸 의지를 잃은 존재
삶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존재
거친 날들을 견딜 용기가 없는 존재
사소한 좌절에도 분노하는 존재
실패를 자신에게도 숨기는 존재
모험 앞에서 등 돌리는 존재
…라고 평가하는 존재는 조용하다.
다툼도 경쟁도 시비도 실랑이도 없다.
다툼은 삶의 의지다.
다툼 없는 삶은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재앙이다.
오늘도 아내와 다툰다
부부는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뻔한 다툼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수많은 시간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공간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인물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일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의도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바람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문제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뭔가를 고르고…,
툭하면 다툽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말하지’
‘그렇게 하지’
‘…’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생각을 탓하고
아내의 행위를 보고 아내의 속내를 타박합니다.
남편의 말끝엔 으레 핀잔이 붙고
남편의 행위 다음엔 당연한 듯 잔말이 따릅니다.
집을 구하느라, 일자리를 구하느라, 서로의 일에 집중하느라, 애송이 부부 딱지 떼느라, 초보 부모 딱지 떼느라,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느라, 새로운 자유를 홀로 감당하느라 허구한 날 목청 돋우고 얼굴 붉힙니다.
부부는 남편으로 성장하고 아내로 발돋움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장점과 단점을 마주하는데 암상궂게도 그것들은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다툼은 단판 게임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언제든 마음대로 과오를 갚을 수도 없습니다. 이미 새겨진 상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다툼을 거듭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미약함을 다독이면서 삶은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다툼의 목록에만 집착하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부부의 다툼은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바라는 삶을 꽃피우기 위해
부부가 바라는 향이 날 때까지 벌이는 긴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다툼이 뜸합니다.
서로에게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닌지, 서로를 포기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흔적이나마 남아있던 정마저 지워져 가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아내의 눈치를 살핍니다.
다툼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이야기하고 서로를 관찰하고 서로를 주의하고 서로를 일깨우고 서로를 조심하고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깨닫고 서로를 변하게 하고 서로의 눈을 뜨게 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필요를 느끼고… 서로에게 관심을 쏟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