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 Apr 24. 2024

아내의 내일이
빠르게 쪼그라든다

아내는 어제가 편하다

“예전 같았으면”
 “10년만 젊었어도”     


조금만 움직여도 헐떡인다.

무엇을 해도 금세 지치고 열기가 식는다.

계획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포기를 선언한다.  

  

세월은 조용히 지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난 자리는 혼란하다.

깨지고 허물어진 것들이 아무렇게나 뒤엉킨다.     


세월의 거친 물결은 삶을 어지럽힌다.

세월은 육신을 무겁게 짓누른다.

세월은 몸과 마음을 철저히 허문다.   

  

그럼에도

‘잘 견디고 있는지’

‘나를 잃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안부가 궁금하다.     


시간의 파괴성에 당당히 맞선 이들

세월의 진득한 압박에도 비범한 솜씨를 뿜어낸 예술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아내는 어제가 편하다   

  

그땐     

미래를 열고 싶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어제 같은 오늘을 혐오했고 새로움에 심탐했습니다.

현상태와 타협하지 않겠다며 푸른 기개를 뿜어댔습니다.  

   

앉으면 책이었고 손엔 으레 연필이 들려있었습니다.

입에선 언제나 새 이야기가 넘쳤고 신발엔 늘 새 곳의 풍경이 묻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달린 책을 내고 깜찍한 명함에 이름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강의를 위해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몇 개의 도시를 돌았고 수백 명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똑같은 기쁨 똑같은 시간을 벗기 위해 여기저기서 만난 이들과 해외 나들이도 잦았습니다.

이달은 이것 내달은 또 저것 그리고 그것은 내년에… 생의 시간표는 뜨거웠습니다.    

 

아내는 몸이 부서지도록 그리고 정신이 출렁이도록 달렸습니다.

그러던 아내였습니다.  

   



근데

지금은     


달리던 걸음을 멈췄습니다.

하루가 빈곤합니다.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희망도 접혔습니다.

날짜마다 무겁게 달려 있던 일거리는 간데없고 먼지만 가득합니다.

달력은 서너 달 전에 멈췄습니다.     


아내는

새로움이 펼쳐지는 오늘보다 어제 같은 오늘을 좋아합니다.

새 얼굴, 새 이야기보다 옛 얼굴 묵은 이야기가 마음에 더 닿습니다.

시간표는 인위가 배제된 ‘자연표’를 따르는 게 편안합니다.     


희미한 눈을 비비며 돋보기에 의존하는 성가신 책 보다 품 들이지 않는 TV가 좋습니다.

빠른 말, 바쁜 움직임보다 느리고 처진 그래서 스르르 잠을 부르는 프로그램이 좋습니다.  

거칠고 날카롭고 파괴하고 짓누름이 없는 영혼을 꽃피우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낯선 말, 낯선 태도, 낯선 행동이 펼쳐지는 프로그램은 왠지 낯설고 어색합니다.

언제부턴가 주름진 이들의 이야기, 골목이 살아있던 흙내 나던 시절 이야기가 좋습니다.   

  

생은 계속되는데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데

시간은 얼마든 다시 시작하기를 허용할 텐데     


내일을 접은 아내가 안쓰럽습니다.

접힌 아내의 내일이 활짝 펼쳐지길 응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는 홀로 걷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