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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Dec 18. 2022

K푸드, 사랑합니다.

김치와 떡볶이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은 노르웨이의 한 여름이었다.


긴 곱슬머리와 오묘하고 새파란 눈빛이 돋보이는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가슴골이 보이도록 깊이 파힌 하얀 블라우스와 상반신은 꽉 달라붙지만 A라인으로 퍼지는 긴 원피스를 위에 입고, 메리제인 펌프스 스타일의 통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앞치마만 안 둘렀지 독일인일까라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옷차림이었다. 놀랍게도 독일인스러운 그녀의 입에서 미국식 영어가 흘러나왔다. 독일의 킬이라는 항구도시의 보딩스쿨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노르웨이로 이직해 왔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독일을 잊을 수 없지만, 드디어 국제학교에 일하게 되어 신난다고 흥겹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톰슨 씨 직장에 새로 임용된 교사라고는 그녀와 톰슨 씨뿐이었고, 우리 가족과 그녀는 학교 인사과 책임을 맡고 있는 분에게 저녁 초대받은 자리였다. 처음 만난 그날 그녀는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데 그중 한국음식을 정말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때는 내가 한국인이고, 요즘 한류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BTS와 K 뷰티 때문에 한말이라고 흘러들었다. 요리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직접 담근 파프리카와 빨간무를 섞은 피클을 집주인에게 선물하였고, 후식으로 먹을 레몬 케이크까지 구워왔다.  


'Merry Christmas! It's great to share kimchi with you! Hope you enjoy it!'

(메리 크리스마스! 김치를 나누어 먹을 수 있어 좋네요! 부디 맛있게 드시길 바래요!)

성탄 선물로 받은 선물들 중 직접 담근 김치가 유리병에 담겨 배달되어 왔다.


여름에 첫인사를 한 후 4개월 만에 김치를 유리병에 담아서 성탄 선물이라고 톰슨 씨를 통해 전해왔다. 미국인이 담근 김치를 맛보는 묘한 기분이란. 기대를 전혀 하지 않고 먹어서 일까. 꽤나 맛있었다. 적당히 맵고 적당히 간이 된 김치였다. 외국인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한국어 같은 반전의 맛이었다. 김치 킬러 톰슨 씨는 오랜만에 맛보는 배추김치를 갓 지은 쌀밥과 함께 순식간에 해 치우고는 빈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노르웨이에서 두 번의 성탄절을 보낸 후 나는 복직을 하였다. 톰슨 씨가 근무하고 있는 국제학교 초등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였고,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곱슬머리의 파란 눈 미국인 아가씨를 다신 만난 것은 교사 휴게실에서였다. 오전 내내 한적했던 휴게실에서는 교사들이 싸온 점심을 데우느라 하나뿐인 전자레인지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전자레인지 옆으로는 줄을 선 도시락들도 보였다. 그중 하나 눈에 띄는 도시락. 빨간 떡볶이였다.

'내가 잘 못 본 것일까.'

동양인 교사라고는 나 혼자인 이 학교에 이 빨간 떡볶이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휴게실 밖 복도에서 시끌벅적한 높은 고음의 여교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쾌활한 미국인, 그녀다.

한국은 가본 적도 없지만 한식을 사랑하는 그녀.

한국 음식에 진심인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자신이 만든 떡볶이를 보라며 까르르 웃었다. 아시안 마트에 한국산 쌀 떡볶이가 들어올 때면 본인이 다 산다고 하며 웃었고, "I love K-food" 라며 엄지까지 올려 보였다. 매운 음식은 좋아하지만, 불닭 라면은 못 먹는다면서 김치와 떡볶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김치 담글 때 사용할 매실청을 노르웨이에서 살 수 있냐는 등 김치 마니아, 미국인 그녀의 질문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우리는 2년 만의 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함 없이 한참 동안 해외에서 만들 수 있는 한식 레시피를 공유하였다.



20년 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자주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마늘 냄새나는 한국 음식 맡으면 역겨워 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낯선 미국 생활에서 그런 일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나는 늘 시리얼, 빵, 샐러드 등 냄새가 안 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는 했다. 다행히 그 당시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었기 때문에 생마늘 냄새가 풀풀 나는 김치는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았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김치, 라면, 매운 찌개류 등 각종 한식을 먹을 수 있는 한인 타운을 탐방하러 갈 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한국을(남한을) 제대로 모르는 서양인들도 꽤 있었고, 한식이라는 것이 알려 지지도 않았을 때였기도 했다. 외국인 학생들이 많은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본인의 전통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누어 먹는 인터내셔널 데이 런치(International day lunch)나 포트락 파티(potlock party)를 가지기도 하였다. 음식 솜씨가 없던 나의 단골 메뉴는 야채 계란말이 정도였다. 김치나 김밥을 만들어 볼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다행히 계란말이는 일본인 학생이 가져온 초밥 다음으로 인기 있었던 메뉴였다. 야채 계란말이나 감자조림 등을 반찬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서양에서는 채식 메뉴로 관심을 받았더랬다.


예전과 달리 한식은 고급화되었고, 유럽의 대도시를 가면 한식을 맛볼 수 있다. 발효음식 냄새가 날까 두려워 안 먹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맛보기 힘들 때도 많다. 매운 음식으로 김치, 라면, 비빔국수, 제육 등은 인기 메뉴이며, 삼겹살, 불고기, 갈비 등 K 바비큐는 이미 최고 중의 최고 음식으로 꼽힌다. 일반 슈퍼마켓에 가면 Korean bbq 소스(불고기)나 매운 소스(제육)가 진열되어 있고, 햄버거집에도 종종 코리안 bbq버거가 스페셜로 나오기도 한다.


17년 동안 유럽에서 거주하면서 알게 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한식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김치나 떡 종류를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육류, 해산물, 채식 메뉴가 다양한 한국 음식은 그 인기가 상상을 넘는다. 빵, 감자, 바비큐, 샐러드 등이 주메뉴인 서양 음식에 비해 한식은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칭찬하는 음식이다.


타국 생활을 하는 국제학교 교사들과 어떤 음식이 그리운지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많은 이들이 본인들 고향 음식 외에도 동양 음식을 좋아한다고 한다. 얼마 전 추수 감사절을 맞아 미국인 동료 교사가 준비한 땡스기빙포트락(Thanks giving potluck)에 초대받았을 때 불고기를 가져갔다. 그날 불고기는 메인 메뉴인 칠면조 구이 다음으로 인기 있는 메뉴이었다. 한식 재료나 한국 음식점이 없는 노르웨이 시골마을에서 한식을 대접하면 모두가 감격할 정도이다. 미국인 동료 교사들과 한식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미국 음식 중 그리운 음식이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특별한 미국 전통음식은 없지만, 미국인 입맛에 맞춘 퓨전 음식들이 그립다고 했다.

" 미국식 태국 음식과 텍스 멕스 정도? 정말 그립다. 미국 음식. American-thai and Tex-Mex cuisine, I miss them so much!"  


역사가 깊고 그만큼 다양한 한국의 전통음식, K 푸드는 맛으로나 영양면에서나 대접받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김치와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한국인에게 자랑하는 미국인이 있을 정도로 해외에서 인기 꽤나 하는 한국 음식 말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운 음식이기에 종종 말한다.

K 푸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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