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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Jan 22. 2023

고난의 기쁨

어제는 고난 ,오늘은 기쁨

2023년 새해가 되자마자 개학을 했다. 학교에서는 과목별 교사들에게 지난 4개월 정도의 1학기 성적과 개별 코멘트를 써서 제출하라고 공지가 떴다. 곧 성적표(Report card)가 나가는 때이다. 나는 현재 파트타임 교사이기에 80명만 가르치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학생수이다. 학기 중에 이루어진 갑작스런 복직이라 아이들을 가르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의 이름도 다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급한 대로 계속 수업은 하였으나 학년별로 주 1회 만나는 아이들을 기억하는 날보다 수업 계획안을 짜고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지난 주말에는 오전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생들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만든 작품들을 보며 학생당 150 단어를 맞추어 코멘트를 작성했다. 그 후로 일주일 내내 (꼬박 앉아 쓴 것도 아니지만) 써 놓은 코멘트를 들여다보며 눈에 띄는 잘못된 철자나 표현을 고쳤다. 다 썼으니 제출하면 되는데, 써둔 코멘트를 매일 붙들고 있는 고난의 시간을 가졌다. 마감일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서도, 집에 와서 요리를 하거나 잠을 자면서도 마음 한편에 돌이 누르는 마냥 무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감일 하루 전날이 돼서야 담당 코디네이터에게 저장해 둔 성적 코멘트를 메일로 보냈다.

"후, 드디어 끝났다."


고작 2주였지만,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보며 끙끙 앓고 있다가 마침내 풀어버린 기분이었다. 지난 17년간 꾸준히 해 온 일이지만, 성적을 내고 코멘트를 쓸 때마다 늘 고민이고 힘들었다. 만나온 학생들이 모두가 다 달라서 늘 같은 고민을 한다. 점수를 주는 것보다 코멘트를 쓰는 이 기간은 정신적으로 꽤나 힘든 시간이다.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쓸 수 있을까. 어떤 부분에 대해 써 주어야 할까. 이 학생의 장점은 무엇일까.

수업에 열정을 가지거나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써 줄말이 넘치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무엇을 잘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수업 관찰 노트를 보며 수업에 흥미가 없고 주위를 맴돌며 아무것도 마무리하지 못하는 아이일지라도, 토론에 참여를 잘하거나 다른 친구를 도와주는지 혹은 수업과는 다른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는지를 찾느라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낸다.

학생들의 작품과 리플렉션, 관찰 노트, 평가서, 수업 계획서 이 네 가지를 두고 열심히 써야 한다.

지난 두 달간 써 놓은 평가서나 관찰노트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들 성적을 마감한 후인 오늘은 기분이 날아갈 만큼 가볍다. 

앞으로 4개월 동안은 평온할 것이며 지난 2주의 고난은 벌써 저 멀리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금요일의 폭설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목요일 저녁까지 적당히(그러나 끝없이) 내리던 눈의 양이 증폭이 되는 날은 여김 없이 금요일이다. 영하 8도. 그나마 따뜻한 날이다. 금요일은 퇴근 후 간단한 식사와 와인 그리고 휴식이 우리의 계획인데, 몇 주째 퇴근 후 눈 치우고 대충 식사한 후 쉬기로 바뀌었다. 주말 내내 따라붙는 근육통과 피로는 보너스다. 금요일의 폭설로 온 동네는 눈 치우는 스노 블로우 나 얼음 깨서 치우는 트럭들로 어두운 거리가 복잡스러워졌다.


흐린 하늘에 쏟아지는 함박눈 덕에 눈을 보는 마음도 눈을 치우는 손도 걱정과 한숨뿐이다. 뒷마당은 유리창 근처까지 눈이 차 올라왔고, 주방에서 뒷마당과 연결된 문은 열 수 없게 되었다. 뒷마당 지붕 아래 숨겨 둔 보트는 눈 아래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뒷마당도 문제이지만, 앞마당에 시간마다 쌓이는 눈을 해결하지 않으면 온 집안 식구가 나서도 해결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을 치우고 이런저런 걱정을 한 지 2주가 되었다. 멀리서 보면 2층집인 우리 집은 쌓인 눈에 가려 1층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가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드라이브웨이는 기존의 너비에서 70%로 좁아졌다. 이제는 차고에서 내려가는 이 길에서도 거북이 운전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멈추지 않는 눈도 문제이지만 간간이 내려준 비와 추운 온도는 눈을 얼어붙게 하였고, 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나무들이 나무 아래로 쉴 새 없이 눈을 퍼붓는 바람에 마당 앞에는 랜덤 눈까지 쌓이게 되었다. 눈은 왜 멈추지 않고 내릴까. 잠깐이라도 쉬어주면 좋을텐데. 눈을 치우고 돌아서면 눈이 쌓여있다. 쏟아지는 눈이 원망스러웠다.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 덕에 '깨진 독 안에 물 붓기', '데자뷔'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 안에 굴러다닌다. 가볍게 경량패딩만 입고 시작한다. 한참 동안 눈을 치우다 보면 입고 있는 겉옷과 속옷이 땀과 눈으로 흠뻑 젖기에 두꺼운 패딩이나 목도리는 필요 없다. 성인 두명이 결국 두 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운 여름날 언덕길을 올라오느라 땀범벅이 된 마냥 헉헉 되며 샤워를 하러 간다. 그래도 눈을 치웠으며, 하루치 운동량을 달성한 것이라 위로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샤워를 하니 그제야 집 안이 썰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상 6도. 잔뜩 쌓인 광고지 중 신문지스러운 것만 집어 뭉쳤다. 주먹만 한 광고뭉치를 만들어 까맣게 그을려 보이지도 않게 된 장작난로의 창을 닦았다. 어느새 안이 보일만큼 투명해졌다. 어젯밤까지 열심히 태우고 하얗게 남아있는 재를 옆으로 밀어 두고, 계란 18개가 담겨있던 종이곽을 반으로 잘라 재더미 위에 올렸다. 그 위에 휘발성 착하제 한 뭉치와 8-9개의 작은 장작을 우물 정(井)으로 쌓고 오랫동안 잡고 있어도 데이지 않을 만큼 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장작 난로의 문을 닫지 않고 0.5센티만큼 열고 불이 붙어 활활 타 오르는 모습을 3분 정도 지켜보았다. 작은 장작의 윗부분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할 때 중간 사이즈 장작 세 개를 집어 그 위에 텐트모양으로 올렸다. 그 후 난로 문을 닫고 숨구멍을 크게 열어두고 큰 장작 하나씩 올리면 큰 불꽃을 한동안 유지 시켰다. 별도의 난방시설이 없는 추운 공기를 빨리 데피는 방법은 난로 안 불꽃을 높고 환하게 오랫동안 지속시켜야 하는 방법뿐이다. 


한참 동안 불꽃을 멍하니 보며 여백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때 몸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뜨거운 홍차를 내미는 톰슨 씨가 옆에 앉았다.

"아... 좋다." 

드디어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 왔다. 그제야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깊은 새벽처럼 어둡다. 마음은 몰라도 몸은 따뜻하게 쉴 수 있다.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큰 불꽃이 오래 지속되면 난로의 숨구멍을 조금만 남겨두고 불꽃을 작게 오랫동안 유지시킨다. 춥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지나갔고, 지금 이 순간은 따뜻하다.


주말인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잤다. 그래도 일출 직전이다.

아이들이 들어와 포근히 안기면서 말했다.

"엄마 눈이 드디어 멈췄어요."

창밖으로는 보랏빛이 사라진 깨끗하고 따뜻한 분홍색과 하늘색 하늘이 아름답게 깔려있었다.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르웨이 겨울이 태양과 함께 우리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이 하늘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이들과 나는 말없이 눈빛으로 이야기 나눈다. 적게는 50센티 많게는 2미터 정도 쌓인 눈들은 온 마을을 하얗게 덮었다. 멀리 보이는 산도, 가까이 보이는 언덕이나 숲도, 호수도 마을과 함께 같은 하얀색이다.

‘이래서 노르웨이에 살고 싶었나봐.’

어제는 눈 때문에 죽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눈 때문에 행복하다.


날씨앱을 켰다. 앞으로 일주일간 춥지만 눈. 눈. 눈 대신 해. 해. 해이다.

밝은 햇빛과 따스한 하늘빛 보이는 바깥 날씨는 영하 17도.

역시 노르웨이 겨울날씨 답다.

그래도 좋다.

눈은 멈췄고, 해가 떴으며 눈과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모두가 기분이 좋은 주말아침이다.


우리 가족은 당분간 눈 치울 일이 없으며, 아이들과 마당 위 가득 쌓인 눈 위를 걷고, 불을 피워 피크닉을 할 것이다. 그리고 노르웨이 겨울의 눈 치우는 고난과 눈 풍경을 맞이하는 기쁨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번 글은 희.로.애.락.애.오.욕 주제 중 '희' 기쁨에 관한 글 입니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성 마음' 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쓰는 공동 매거진 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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