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a! 즐거운 스페인 여행
마음만은: 일상을 여행처럼.
떠나기 하루 전 여행용 파우치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여행 짝꿍 톰슨 씨는 이미 적당한 여행 가방(파우치 4개와 세면도구가방 하나가 들어갈 정도)을 골라 거실에 벌려 두었을 것이다. 각자의 여벌옷을 넣는 파우치 하나에는 바지와 셔츠등 두어 벌 외출복, 잠옷, 양말, 속옷 몇 가지이다. 내륙지역 스페인은 아직 추위가 머문다는 소식에 노르웨이에서는 늘 입는 내복(wool)을 특별히 더 챙겼다. 두 달 전 여행을 다녀온 후 그대로 두었던 손바닥 만한 지퍼백 속의 헤열제, 설사약, 소화제도 다시 채워 넣었다. EU지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대부분의 유럽 거주자들이 꼭 챙기는 것은 거주권(아이디카드)이고, 우리처럼 이방인 거주자는 여권도 함께 챙긴다. 요즘은 카드를 쓰는 나라가 제법 늘어서 예전과 다르게 유로화를 넣어 두었던 여행 지갑이 텅 비어있다. 여행가방은 달랑 한 개이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배낭 하나씩을 챙긴다. 각자의 물병, 간식, 책, 태블릿, 휴대폰, 헤드셋, 충전기 등이 들어간다. 유럽에 사는 우리가 유럽여행을 갈 때는 마치 서울에서 고속버스 타고 세 시간 정도 떨어진 타 지역을 가는 것처럼 가볍게 떠난다.
북유럽에 사는 우리가 덜 추운 유럽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두어 시간 만에 새로운 곳에 갈 수 수단인 비행기는 아이들에게는 늘 설렘이다. 물론 어른인 우리도 긴 운전을 하지 않고 맥주 한잔 곁들일 수 있는 여유를 챙길 수 있다. 가까운 거리의 유럽 어느 곳에 짧게는 닷새, 길게는 열흘을 머문다. 추운 노르웨이 시골에 사는 우리 가족에게 이 짧은 여행은 겨울 탈출, 저렴한 외식, 다양한 문화 경험, 사람 구경 등 눈과 입이 호강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에게 이 여행은 텅 빈 하얀 종이에 강하고 약한 선으로 채워 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룬 듯한 기분 좋은 일이고, 조용하고 지루한 배경 음악에 한 가락을 추가하여 움치둠치 할 수 있는 신나는 것이다.
10월부터 시작되는 노르웨이의 긴 겨울은 내게 따뜻한 스페인으로 가라고 말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추워지는 그 시점부터 눈만 뜨면 노르웨이에서 갈 수 있는 직항 도시 중 스페인 남부 티켓을 먼저 훑는다. 종이뭉치와 연필, 학교 달력(학사일정이 담긴 달력)을 옆에 두고, 방학 날짜와 할인티켓 날짜를 동시에 보아가며 저렴한 왕복티켓이 보이면 클릭, 예약. 클릭, 예약. 눈과 손이 바쁘다.
그렇게 두 달 간격으로 알리칸테와 마드리드를 예약하였다. 왕복 60달러짜리 티켓이라 기분 좋게 비행기 표를 샀다.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오면 다시 두 번의 여행을 계획한다. 노르웨이가 조금 따뜻해지면 유럽은 이미 여름 날씨이다. 그럼 더 많은 선택의 폭이 주어진다. 일상이 여행인 것인 양 10월, 12월, 2월, 4월, 6월, 8월 이렇게 두 달 간격으로 여행을 떠난다.
즐겁다.
유럽이라서가 아니라 떠나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내 마음은 따뜻한 태양 아래를 거닐고 있고, 어느새 타파스 바에서 오징어 튀김을 오물오물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한낮의 강한 빛줄기를 줄기차게 뽑아낸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에 머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표를 예약한 그 순간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맛있는: 여행을 일상처럼.
여행 온 둘째 날, 아이들과 시내를 돌아다니고 이곳저곳 음식점이나 상점 구경을 한다. 처음 방문하는 이곳의 하늘, 나무, 사람들, 상점들, 호텔 모든 것이 자극이 되어 즐겁다. 늘 계획 없이 오는 여행이기에 도착한 후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한다. 보통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와 무엇을 볼 것인지 정도를 정한다.
이번 여행은 스페인 마드리드. 바다가 없는 스페인 내륙지역은 처음이고, 스페인의 수도이자 관광지인만큼 마드리드 여행은 'Eat, Walk, Look'으로 정했다. 2월의 겨울일지라도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선글라스를 껴야 할 정도로 눈이 부시며 뜨거웠지만, 그늘지는 곳은 서늘하여 매우 추웠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마드리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건조한 추위였다. 사막 위 나무 그늘 속 시원함이라고 하기엔 춥고, 더운 곳에 서 있다가 들어간 서늘한 와인 창고 안 같은 느낌이랄까. 아님 지하 깊숙이 판 동굴 속 추위와 같다고 해야 할까.
태양을 피한 골목길 속 그늘에서는 내복, 털점퍼, 패딩을 입어도 추웠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파란 하늘을 비추는 햇빛과 높은 건물 뒤 그늘 속 추위는 마치 이른 봄날의 짝꿍인냥 잘 어울려 보였다.
평소에 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우리 집은 호텔 조식이나 여행지의 음식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음식천국 스페인에 왔으니, 9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호텔 조식은 패스하고 마음에 드는 카페를 다섯 군데 정하여 매일 아침 맛집으로 출근할 상상을 한다. 스페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에스타(낮잠) 시간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2시,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아침저녁으로 먹고 마실 수 있는 나라이다. 거기에 겨울이나 유명한 관광지는 보통의 오후 2시-5시 시에스타 시간까지도 없는 카페나 레스토랑도 꽤나 많다. 그야말로 하루종일 먹고 마시기만 반복할 수 있다. 실제로 스페인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세끼를 다 챙겨 먹다가 통통하게 살쪄 온 적이 있다.
스페인 어느 지역에서나 정육점에서 썰어놓은 싱싱한 고기처럼 빨간 Jamon(스페인 하몬 햄)을 만날 수 있다. 하몬 햄을 넣은 바삭한 바게트, 방금 즙을 내어 달콤한 오렌지 주스, café solo처럼 뜨겁고 진한 커피를 주는 카페는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각종 과일과 오렌지로 장식한 팬 케이크나 크레페를 맛볼 수 있는 예쁜 카페, 으깬 아보카도를 얼굴만한 토스트에 발라주는 토스트 전문 카페, 오징어 튀김등을 얹은 해물 타파스와 맥주가 아침부터 나오는 타파스 바등 브런치 천국이다. 눈길에 잡히는 먹거리 때문인지 하루 세끼를 챙기는 우리의 밥시계 때문인지 늦은 점심도 일정에 포함시킨다. 수도인 마드리드에서는 스페인 전통 음식점 외에도 각종 외국 음식점이나 패스트푸드도 모두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한 끼 정도는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패스트푸드로 간단히 해결하기도 하는데, 이번엔 KFC가 당첨이다. 노르웨이에는 없기 때문이다. 늦은 점심 후 아이들과 낮잠을 자거나 호텔에서 쉬는 시간을 가진다. 저녁 5시가 지나면 스페인의 거리가 다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여행지에서 톰슨 씨와 짧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에스타 시간을 가지고 나서, 두 시간 정도 아이들 없이 쇼핑도 하고 타파스 바(bar)를 갔다. 이번엔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오래된 술집 'Meson del champinon' 으로 향했다. 시내 뒤에 위치하여 찾아가보니 마치 검은 망토와 모자를 쓴 조로가 나타날 것 같은 옛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지가 쌓인 두툼한 가죽커버를 가진 책과 촛농이 쌓여 멋들어진 촛불과 촛대가 있을 것만 같은 어두운 실내. 굴 속 아래의 낮은 천장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 오래된 분위기나 소품도 좋은데, 깊숙이 들어가 보니 백 년 정도 되어 보이는 벽 속 타일이나 오르간을 연주하는 할아버지까지 보였다. 구수한 뻥튀기나 투명한 붕어 엿을 옆에서 팔 수도 있을 만큼의 추억 속 계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엄지손톱의 두 배만 한 길이의 올리브 향과 상그리아로 혀는 이미 달달해졌다. KFC를 즐기지 않아 허기가 졌는지 헤밍웨이가 즐겼다는 양송이 구이, 고추구이, 스테이크가 허겁지겁 맛있게 입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먹고 초등학교 때나 들었을 법한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술잔을 더 기울일 수 있었다. 우리 둘의 자유시간이 즐거웠다. 서로에게만 관심을 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작고 오래된 헤밍웨이 술집을 나와 걸은 밤 기온은 제법 쌀쌀했고, 거리마다 빨갛게 밝힌 난로 아래 모인 사람들은 담요를 두르고, 뜨거운 핫 초콜릿과 츄러스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을 호텔에서 데리고 나와 스페인 전통음식인 빠에야(Paella)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1902 초콜릿 콘 츄러스'라고 멋들어지게 쓰인 간판을 따라 들어갔다. 무작정 굵고 얇은 츄러스를 네 개씩 시키고, 뜨거운 핫 초콜릿 두 잔과 커피 두 잔을 시켰다. 뜨거운 츄러스를 스페인 사람들처럼 앉아 뜨겁고 끈적한 초콜릿에 찍어 맛보았다. 초콜릿이 이렇게 꿀맛이었나. 내 입 맛이 바뀐 것도 아닐 텐데, 아이들과 함께 츄러스를 초콜릿 컵의 하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찍고 또 찍어 먹었다.
특별히 관광지를 간 것도 아니었고, 음식점과 술집에 간 것뿐이었다.
마치 마드리드에 살면서 마주한 일상처럼.
기분 좋은 날이었다.
눈에 담는: 여행을 일상처럼.
늘 큰 계획 없는 여행을 가지만, 시간을 내서 미술관에는 꼭 간다. 스페인의 경우는 저녁 늦게까지 여는 미술관이 대부분이고, 마지막 관람시간 두 시간은 보통 무료입장일 경우가 많다. 따뜻한 기온 덕분에 사계절을 막론하고 관광객이 많은 스페인이지만, 겨울에는 약간 한산한 편이다. 인파에 시달려 보는 큰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나는 평일 아침 일찍 가거나 저녁에 가는 편이다. 줄 서는 것도 딱 질색이라 시간 예약을 한 티켓을 미리 구매해서 간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처럼 유명한 미술관을 다녀오는 것도 좋지만, 규모가 작고 알찬 미술관을 추천한다. 특히나 화가의 작업실이나 생가를 미술관으로 만든 곳은 분명 기억에 남는 방문이 될 것이다. 마드리드에는 '호아킨 소로야 Joaquín Sorolla'라는 인상파 화가의 생가가 미술관으로 개조되어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화풍의 바다 그림이나 인물화가 전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물건이나 가구 등도 볼 수 있었다. 그의 그림과 그가 생활하던 집안 구석구석까지 눈에 가득 담고 왔다.
다시 한번 즐거웠던 여행의 기억으로 내일을 새로이 시작 할 것이다.
이번 글은 희. 노. 애. 락. 애. 오. 욕 중 '낙' (즐겁다)에 관한 글입니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성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 애. 락. 애. 오. 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