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
내가 어른으로 살면서 무서웠던 적이 두 번 있었는데, 그때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을 맛보았던 것 같다. 마치 비눗방울 안에서 내 의지와 달리 어디론가 떠 다녔던 느낌이었다랄까.
고통의 무게와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곳이 삶보다 가까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나와 짝꿍이 코타키나발루라는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내 인생의 행복기를 맞이했던 그때는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수영을 좋아했던 나는 바다를 꽤나 좋아했었고, 그날도 계획에 없던 섬 투어를 떠났었다. 도착한 섬에서는 각자의 자유 시간으로 점심도 먹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시간을 보냈었다. 짝꿍과 나는 무슨 자신감이었던 것인지 구명조끼 없이 10미터 깊이 정도로 먼 앞바다까지 갔던 것 같다. 스쿠버 다이빙은 여행 갈 때나 했던 것이지라 기본 상식도 없던 나는 그저 수면 위에서 보이는 알록달록한 코랄과 귀여운 물고기들 구경에 푹 빠졌던 것 같다. 어느새 혼자가 되어 구경을 한참 했다. 순간적으로 몰아닥친 파도가 내 코와 입속으로 들어와 나를 바닷속 깊은 곳으로 짓누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행히 섬사람인 짝꿍은 바다와 평생 산 지라 눈뜨고 바닷속을 다니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조개도 따고 성게도 가져오는 등 자연과 능숙한 사람이다. 위에서부터 가라앉는 나를 그가 바닷속에서 보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때 이후로 물이 어렵고, 수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는 살면서 내가 잘한다고 해서 함부로 덤비지는 않는다. 모든 장비를 갖추고 준비가 되었을 때 덤비기도 하고 그냥 그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워킹맘으로 바쁘게 살던 시절, 13 년 차가 되었을 때 크게 몸과 마음이아픈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나 일 욕심이 많았다. 거절하지 못했던 나의 잘못이 컸고, 육아와 함께 내가 끌고 온 일은 자꾸만 이불을 잘 못 개어 정리가 안되고 짐이 되어가는 것 마냥이 되었다. 일이 틀어진 날은 마음의 상처도 크게 받았다. 유난히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고, 대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출장자들에게 워크숍을 제공하는 날이라 긴장도 되는 날이었다. 일이 터졌다. 바쁜 일정 덕에 주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겨우겨우 끝내고 퇴근해 들어왔는데, 왼쪽 귀밑에서부터 뒤통수로 크게 부풀어온 혹과 함께 심한 통증이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왼쪽 혀부터 왼쪽 안면 전체에 마비가 온 적이 있었다. 낮은 면역력과 높은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만나 뇌 속의 신경에 감기처럼 온다는 병이었다. 안면 마비 혹은 구안와사 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무도 없었던 주말 응급실, 당번을 서든 간호사가 급하게 전화로 처방받아먹은 항생제는 다행히 6주 후에 온전한 얼굴을 돌려주었지만, 6주라는 시간 동안 아마도 내 평생 울음을 다 토해 내었던 것 같다. 이대로 한쪽 얼굴이 안 돌아 오면 어쩌나, 식사도 이렇게 해야 하면 어쩌나, 아이들은 어쩌지,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에 갇혀 있었다. 그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의 나라에서 응급실도, 약도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일 이 있었던 때부터 나는 회사 컴퓨터도 일감도 집으로 들고 오지 않았고, 면역력 키우기와 스트레스 안 받기에 힘을 썼다.
나는 이 두 가지 경험으로, 나에게 무서운 일이 닥치려고 할 때마다 나는 나의 뒤에 숨는다. 내가 먼저 나를 지켜주기 위한 변명이라 해 두자. 미리 먹는 영양제라고 해두자.
나는 자주 명상의 시간을 갖고, 자주 랜선을 끊고, 자주 지켜보기만 할 때가 있다. 외로움도 슬픔도 너무 깊은 골짜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혼자서도 즐겁고 평온한 일을 즐기게 되었다.
평온의 상태를 가져주는 것이 삶과 죽음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 로 책을 출간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를 짓누르는 또 다른 무게의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이 그를 에밀 아자르 라는 이름 뒤로 숨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나의 뒤에 숨는 나도 '나'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