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제시’라 할 수 있다. 달리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몇 킬로미터를 달릴지, 언제까지 완주할지를 정해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든다. 어디로 나아갈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방향을 정해주고, 끝까지 버틸 힘을 준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도 이상적이고 어른스러운 목표를 제시해 주면 될까? 문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학창 시절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하게 피어나는 시기다. 그 아이들에게 공부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게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나 역시 그러지 못했고, 내 주변의 동기와 지인들 또한 그랬다.
아이들에게 “넌 왜 공부해?”라고 물으면 보통 이런 대답들이 돌아왔다.
부모님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성적이 잘 나오면 기분이 좋고 칭찬받고 싶어서
100점 맞으면 원하는 걸 사준다고 해서
어떤 답변은 다소 귀엽고, 또 어떤 답변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게 틀린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답변이다.
지금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온갖 아는 척을 하며 자신이 더 멋진 사람이라는 걸 뽐내고 싶어 하듯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공부는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40대 직장인에게 묻는다면 또 다른, 어쩌면 세상에 물든 현실적인 답변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처럼 각 나이대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목표의 수준과 무게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부모와 선생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더 넓고, 더 본질적인 깨달음을 아이가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에게도 그런 어른들이 있었다. 언제나 더 높은 비전을 제시하고, 더 본질을 말해주던 선배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그 발자취를 따라가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아쉬움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에 맞게, 눈앞에서 피부로 와닿는 구체적인 목표다.
초등학생에게는 멋진 로드 자전거
중학생에게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멋진 옷
고등학생에게는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 예매권
이런 것들이 아이들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고, 공부를 할 이유가 된다.
똑똑한 부모는 자신의 철학과 지혜를 아이가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깊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현명한 부모는 그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춰 짧은 주기 안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하면 공부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을까? 결국 물질적인 보상만을 좇는 공부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대학생과 대학원생조차 공부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중등 학생들에게 본질을 설파하려 드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욕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