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노화도라는 작은 섬에서 1949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섬을 벗어나는 일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섬을 나온 후 한 시도 일을 놓지 않으셨어요. 이제 70세를 넘어 80세로 기울고 있는 지금까지도 말이지요.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 한평생을 일구어 나간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드리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부족한 나의 글을 읽는다면,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얕은 바다에서 나는 생물은 큰돈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이 마음먹고 바다로 나가면 그날 저녁 찬거리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용기 있는 이들에게는 더 후하게 베푸는 성향이 있어 목숨을 내걸고 집채 민한 파도와 맞설 용기를 가진 자들은 더 먼바다로 나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영임과 두 아들이 전부인, 배 한 척 없는 섬사람은 제 자리만 맴돌 뿐 쉬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멀리 나갈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편은 만선을 해가지고 오겠다면 배에 올랐다.
"조심하씨요."
"이 사람아. 언제부터 그렇게 걱정이 많아당가."
만삭인 아내의 늘어가는 걱정이 더 걱정이라는 듯 혀를 차며 남편은 자욱한 새벽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이었다.
배 속 아이가 한번 움직이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편안하게 윗목에 누워 쉴 팔자는 아니어서 윗집 순례네 가을걷이를 도우러 갔다. 그것이라도 해야 일이 끝나면 이삭이라도 주울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삯일을 나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은 뱃일을 아내는 밭일을 해도 먹고사는 것이 녹록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하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날따라 '딱 하루만 쉬고 싶다'는 생각과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물처럼 들어와 수위를 높였다.
해가 바다 저편으로 사라질 무렵, 포구의 술렁거림이 시작되었다.
" 저거 순철이 아녀라? 우야꼬"
작은 섬이라서 전해지는 소문도 빨랐다. 영임은 배가 뒤집혔다는 소리를 듣자마다 뛰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순철아범의 이름. 남편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간 이를 부르는 소리가 절망스러웠지만 아직 남편 이름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살아 있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기만 해라.'
평생을 다음 끼니 걱정하느라 부처님이나 하나님을 찾아본 적은 없지만 이럴 때면 마음속으로 부르고 또 부르게 된다. 영임은 누구든 남편의 죽음만은 막아주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쳐진 배울 붙잡고 포구를 향해 뛰었다.
영임이 나타나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사람들이 그녀에게 달려든다.
"우얄까, 정희어멈 이제 어째쓰까."
아이의 울음이 뒤섞이고, 여자들의 곡소리가 퍼져 나갔다. 싸늘하게 식은 남편과 함께 돌아온 도련님의 주검을 앞에 두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피어본 적 없는 청춘. 오직 먹고사는 일만이 천명이라는 듯 살아온 그들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영임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눈물이 흐르고 '아이고, 아이고' 곡이 터져 나왔다.
바다에 나가 죽은 조상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미 간 사람의 짧은 생을 잘 마무리하는 며칠간의 의식이 끝나면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지는 법이다. 남은 가족이 버티고 일어서야 하는 이유이니 오래 슬퍼할 겨를이 없다. 6살 정희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영임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이틀이었다. 30살 젊은 별이 하나씩 둘 씩 떨어지는 섬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내 자식이라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독기만이 오늘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다.
아들은 절대 배를 타게 하지 않겠노라고, 아들은 자기 손으로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아이고, 아이고'
바람 부는 날이면 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섬이 오래도록 품어온 소리였다. 섬의 곡소리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남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이 섬에 귀하디 귀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섬의 밤을 적셨다. 삶도 죽음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밤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가 태어난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서툴렀지만 서서히 무르익어갔답니다. 80세를 앞둔 지금이야말로 가장 농익은 상태인 것 같아요. 곁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