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 8906 버스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댓원스>를 아세요?

by 첨지




최근 재개봉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댓원스>를

남자친구와 보러다녀왔다. 그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여행지로 가던 비행기 안이었다. 비행기의 좁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인생에서 단 하나의 영화만 볼 수 있다면 이걸 선택해야지.

그리고 관심도 없어보이는 남자친구를 부득불 내가 미리 예매한 영화표까지 쥐어주면서 보러다녀온 것이다. 남자친구랑 꼭 한 번 다시 보고싶었던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그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장난식으로 떠도는 대학 3대마요가 있다. 1. 과cc 하지마요 2. 과대하지마요 3. 술먹다 그 새끼랑 초코에몽 먹으러 가지 마요

모든 안전수칙은 피로 쓰인다는 말을 알고 있는가? 이 안전수칙을 닮은 3대마요도, 누군가의 피로 쓰여진 것일 거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설렘을 못이기고 얼렁뚱땅 사귀어버린 ex를 피해서 시간표를 짜던... 숱한 누군가들의 피가 묻어있다.

하지만 웃기게도 나는 2번을 제외하고 모든 걸 해봤다. 나는 술먹다 초코에몽 먹으러 간 그 새끼랑 1년 넘게 과cc 중이다.



나이는 나랑 같지만 학번은 더 아래인, 엄밀히 따지면 후배인 남자친구를 만난 곳은 동아리였다.

과연극동아리에서 남자친구는 그 해 처음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그는 배우 지망생이었는데, 첫 리딩시간에 묵직한 목소리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발성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흉통을 울리는 것처럼 퉁퉁 나오는 목소리가 매우 감미로웠다.



그와 함께했던 마지막 연극이 떠오른다. 몇개월간 붙어서 연습을 했던 우리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마지막 날이었다. 총연출인 나는 무대 바로 앞 좌석 1열에 앉아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휴대폰과 대본을 붙들고 있었다. 우리 학교 대강당의 단은 높았기 때문에, 무대 위 배우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거의 치켜들어야했다. 그런 내 시야에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를 활보하고 있는 그가 들어왔다. 내가 디렉했던 몸짓, 내가 디렉했던 감정, 내가 디렉했던 표정. 나의 배우.



배우와 총연출이라는, 조금은 특이했던 우리 사이는 연극이 끝나자마자 여느 과cc 커플과 다르지 않게 너무나도 평범하게 변했다. 학년이 달랐기 때문에 전공수업은 같이 못들었지만, 최대한 교양 수업은 겹쳐서 시간표를 맞췄다. 공강일때는 언제나 함께했으며 학교 앞 맛집 도장깨기도 함께했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우리는 더이상 술을 먹을 일이 없었다. 굳이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순간이 즐겁고 사랑스러웠다.



남자친구의 자취방에는 LP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좋아하는 LP를 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LP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워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했고 그가 좋아하는 대탈출을 정주행했다. 정말 많은 대화를 하면서 그의 성격과 가치관, 신념같은 걸 알게 됐고 나보다도 상대를 더 잘 아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다.

모든 시간을 붙어있었기 때문에, 100일에는

“아직 100일밖에 안됐어?” 이런 말이 오갔고

300일에는 “아직 300일밖에 안됐어? 10년은 사귄 것 같은데.” 이런 말이 오갔으며 500일에는 “아직 500일이라니... 결혼한 줄 알았어.” 이런 말을 웃으며 주고받았다.



친구도, 가족도 뒷전이었던 서로가 전부인 세상이 끝난 원인은 내 휴학이었다. 휴학을 하고 내가 직장에 취업하면서, 남자친구와 나는 멀어져갔다. 그당시에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었다.

남자친구는 나의 일을 반대했다. 10시간 동안 일하면서 하루에 세번 연락하는 게 고작인 그런 생활을 받아들이기는, 아무래도 파트너로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남자친구가 곰신이 된 꼴이었다.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여자친구가 10시간씩 중노동을 하는 걸 반길 남자친구는 아마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때는 매일같이 냉전이었다.

남자친구는 퇴근한 나에게 계속해서 퇴사를 권유했고, 일을 하기에도 벅찼던 나는 그런 요구를 듣는 것자체가 너무 피곤했다.



모든 감정의 골은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준다. 납득하기 힘들어보였던 남자친구는 점차 이런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그는 나보고 퇴사를 종용하는 대신 나를 찾아오곤했다.

남자친구의 본가와 내 본가는 지하철 노선 양 극단에 떨어져있다. 7호선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 지하철로만 2시간 30분이 걸리고 부대시간을 포함하면 3시간도 걸린다. 그야말로 롱디였다.

그랬던 그가 내 퇴근시간인 10시에 꼬박꼬박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 나를 보면서 해맑게 웃던 그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첨지야! 너네 동네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었어.”



8906번 버스는 빨간 버스였다. 국도보다는 고속도로의 전용도로를 따라 달리는 버스이다. 지하에 얽기섥기 나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지름길로만 다니는 버스는 그를 1시간만에 나에게 보내주었다.

8906번 버스의 막차시간은 11시 8분이었다. 그는 매번 10시에 퇴근한 나를 픽업해서, 근처 카페에 도란도란 앉아있다가 11시 8분 막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고작 40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일같이 들르는 카페는 우리의 단골가게가 되었다.



나는 처음 휴학계를 내면서 조금 걱정이 앞섰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실제로 주변에 그런 사례도 무지 많았기 때문에, 조금 두려웠다. 오히려 감질맛나게 만나는 하루 1시간은, 우리를 목마른 사람들로 만들어주었다. 태양 아래 잔뜩 메말라있던 목구멍은 가끔씩 쏟아지는 물을 게걸스럽게 먹기 바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몇 안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조금 더, 애틋해졌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찾아오는 남자친구를 내 직장 동료들도 서서히 익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매장을 처음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내가 좋아하는 아아를 들고 들어온 그는, 마치 우리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의자에 앉아서 설렁탕 한그릇을 주문시켰을 뿐이었다. 가끔 눈이 마주칠때마다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는 윙크만이, 우리가 커플이라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내 직장 동료들은 짓궂게 웃으면서 남자친구의 테이블에 서비스 공기밥을 넣어줬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그 물음에 주임님이 킬킬 웃던 게 기억난다. “나도 누군가의 부모거든.”



남자친구를 몇번 보고나자 나의 동료들도 그를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에 대한 질문이 좀 더 편하게 이어졌다. “너 남자친구는 꿈이 뭐야?” “너 남자친구 되게 착해보이더라.”


“너. 남자친구랑 결혼하고 싶어?”



밥을 먹다가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나의 가정을 꾸리는 게 한평생 소원이었다. “결혼은 하고싶어요.” 그러자마자 저 건너건너 테이블에 있는 사람까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

“첨지야. 결혼은 절대 하는 거 아니야. 절대 안 변할 것 같았던 사람들도 결국 변해. 자식 낳느라 살찌고 못생겨지는 거 이해해주는 남자 하나도 없다? 그렇게 살아야 돼. 집안일도 너가, 돈 버는 것도 너가... 이혼 숙려캠프 있잖아. 요즘 유행하는 TV 프로그램 말이야. 그거 다 먼 세상 이야기일 것 같지? 정말 놀랍게도 다 사실이야.”



그들의 말에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댓원스>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주인공 양자경이 남편에게 한 대사였다. “당신이 없는 나의 삶을 보고왔어. 너무 아름답더라.”

통칭 에에올은 메타버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람이 일생동안 하는 아주 사소하고 세세한 결정에 따라 하나의 평행세계가 생겨난다. 결국 나중에는 수억개의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있는 나의 직장 동료들은, 분명 그들의 갈림길 중 한 포인트 ‘결혼’이라는 지점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 테다.



나는 열변을 토하는 그들에게 그냥 열없이 웃어보였다. “그래요?” 라고 조금 싱겁게 내뱉은 대답이었음에도 그들은 만족한 것 같아보였다. 그들이 그토록 후회하고 있는 인생의 한 갈래 ‘결혼’을 밟지 않은 나에게 그런 메세지를 전한 것만으로도 후련해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 과거의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그렇게나 간절하게 나에게 전한 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기게도 직장 동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가장 많이 상상해보게 됐다. 상상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매일같이 겪는, 그런 일상적인 기억들이 산발적으로 우다다 떠오르기 일쑤였다.

휴대폰도 잘 충전하지 않고 다니는 나를 위해 보조 배터리를 들고 다니는 남자친구, 눈물이 많은 나를 알고 있어서 영화를 보다가도 몇번씩 내 얼굴을 확인하는 남자친구,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나를 위해 j가 되어보겠다는 남자친구...



하루는 그런 일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 지하철로 출근했기 때문에 한달에 교통비가 거의 10만원에 가깝게 나오곤 했었는데, 어느날 같이 대중교통을 타다가 남자친구가 교통카드를 찍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의 교통비보다도 훨씬 큰 숫자가 교통요금으로 찍혀있었다. 빨간 버스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요금이 비싸다. 그 버스를 매번 타고 나에게 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숫자를 확인하자마자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런 내 옆에서 남자친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 교통비가 더 많이 나왔다~? 내가 이겼어!”



마치, 우리가 내기를 하자고 약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뻔뻔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남자친구는 나를 잘 알았다. 뭐만하면 미안해하고 배려하려드는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교통비를 부등호 놀이로 바꾸어버렸다. 커다란 쪽이 이기는 거다!

나는 그 커다란 숫자의 교통비가 사랑으로 보였다.



<에브리띵 에브리데이 올댓원스>의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그런만큼 모든 순간 남자친구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지만, 가장 그를 떠올리게 했던 작중 대사가 있었다.

“우리딸은.. 고집불통에, 엉망진창에, 결핍 투성이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 결핍을 채워줄 다정한 사람을 세상이 보내줄 거니까요.”



생각해보면 첫 만남때부터 그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총연출이라는 커다란 직책을 맡아서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잘할 수 있을까, 잘하고 있는 걸까?

그때마다 나를 안정시켜줬던 건 남자친구의 두 눈동자였다. 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신뢰감 가득한 눈동자. 그가 나를 향해 보이는 신뢰를 통해 나도 나를 믿을 수 있었다. 나의 배우, 나의 연인, 나의 사랑.

사귀기 전부터 시작됐던, 내 결핍을 채워주는 그의 다정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때는 내가 그의 결핍을 채워주면 되지 않을까.



“결혼.. 그래도 조금 하고 싶은데요?” 내가 직장 동료들에게 말하자 또다시 잔소리가 산더미로 쏟아졌다. 그걸 들으면서 나는 또 하하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는 좋은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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