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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 부끄럽지만 도망치는 건 도움이 된다

애정은 쌍방이다

by 첨지 Mar 06. 2025



내 유년시절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모두 엄마와의 일화이다. 우리 엄마는 칭찬에 인색했다. 웃긴 건, 다른 사람의 칭찬에도 인색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옛날 내가 초딩시절 미술학원을 다닐때의 일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엄마! 미술 학원 선생님이 나보고 그림 잘 그린다고, 재능이 있대.”

“그건 그냥 너가 학원 오래 다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주는 말이야.”



그 냉정하고 현실적인 말을 들으면서 자란 결과 나는 무척이나 염세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친구 사이의 칭찬도 항상 사교적인 빈말이라고 생각했고, 스무살 처음 나간 알바에서도 ‘첨지가 일머리가 있네.’라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혼자 코웃음을 쳤다.

심지어 우리 매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도, 쏟아지는 칭찬 속에서 의연하게 답할 정도였다.

“첨지야. 손이 왜 이렇게 빠르고 센스가 있어? 여기있는 웬만한 어른보다 일을 더 잘한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그냥, 이런저런 알바를 많이 해봐서 그래요.”



MZ 답게 표현하자면, 나는 n과 s의 비율이 항상 50대 50 정도 됐다. 이상과 현실의 가운데에 서있는 게 항상 나였다. 그리고 내 성격이 엄청난 이상주의자라는 걸 생각하면, 무려 50%의 현실직시 능력은 모두 우리 엄마의 공이었다. 아마 딸이 사람들의 호의에 홀딱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양육방식이었을 터다.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사기에도 넘어가지 않을만큼 현실적인 눈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나는 늘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곤 했다.



내가 우리 매장에 입사하기 전, 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학기가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다. 마치 몸이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것만 같다.

해가 바뀌면서, 남자친구는 연극동아리의 회장이 되어있었다. 2024년도의 총연출은, 내가 총연출이었을때 나의 배우였던 한 여자아이였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그녀가 총연출 역할을 탈퇴하게 되면서... 남아있는 유일한 경력직이자 동아리 선배였던 나는 그 공석을 이어받게 되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3개월동안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던 일들을 정신없이 처리해나갔다. 원래는 3월 전에 나왔어야 했던 연극 대본을 일주일만에 썼고, 배우들의 첫 리딩 연습을 주도했으며 연습 일정을 잡고 아이들의 디렉을 해주었다. 그때는 모든 게 잘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내가 커다란 갈등에 휘말린 계기는, 한 남자주인공 때문이었다. 남자주인공은 24학번으로, 나와 두 학번 차이가 났지만 동갑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연습을 밥먹듯이 빠지기 시작했으며, 나의 디렉도 듣는둥 마는둥 굴었고, 연습때도 아프다며 책상에 엎드려있기 일쑤였다. 나는 결국 그에게 날선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극은 너가 거의 원맨쇼하는 극인데, 너가 이렇게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극 못 올려. 알바를 해야해서 시간이 없고 아파서 힘들다면 동아리를 나가. 연극을 계속 하고 싶다면 다른 배역으로 바꿔줄게. 하지만 너가 주인공으로 연극을 계속 하고 싶다면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그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목에 빳빳하게 힘줄을 세운 그가 나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 나는 조금 망연한 기분으로 지켜봤다.

“선배가 내 사정을 알아요?! 자취방 월세도 내가 부담해야하고, 엄마 병원비도 내가 대야해요. 지금 안그래도 바빠죽겠는데, 내가 노력을 하는지 어떤지 당신이 어떻게 알고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해요?”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두 학번 아래 후배 앞에서, 나는 결국 사과를 했다.

“미안해. 내가 니 사정을 몰랐다.“

그때 나는 이미 연극 동아리에 소속된지 3년차였다. 지금껏 내가 겪은 건 그런 것들이었다. 우리 연극은 과교수님들도 전부 보러오시는 연극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꽤 컸고, 그랬기에 선배들도 항상 엄격했었다. 항상 즐겁게 지냈지만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놓치지 않고 우리를 타일러 줬다. 마땅히 해야하고,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 뿐이었는데 내 눈앞에는 분노를 못 이겨 치를 떨고 있는 후배가 있었다.



그 아이와의 갈등은 계속됐다. 칭찬을 해주고 어떻게든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억지로 연습을 끌고 나갔지만, 결국 일은 크게 터졌다.

그는 부원 전체 카톡방에 나를 고발했다. 내가 인격모독을 저질렀고, 친한 사람들을 끌고 와서 자기를 조리돌림했으며, 남자친구인 회장 뒤에 숨기만 하는 비겁한 행동을 보였다는 거다.

내가 하지 않은 일들 뿐이었다. 하늘 아래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랬기에 그가 동아리 카톡방으로 그치지 않고 개인 인스타에까지 나를 저격하기 시작했음에도 별다른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는 내 지인들이 많았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연습날 하루 참여했던 예년도의 선배는 나를 붙잡고 간곡하게 부탁하기까지했다. “첨지야. 너가 우리를 생각해서 동아리의 유지를 이어가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상태로 끌고 가는 건 무리야. 넌 할 만큼 했다. 동아리 여기서 멈추고 그냥 휴면시켜.”



결론만 말하자면 동아리는 휴면되지 않았다. 내가 그 동아리를 나왔다. 사정을 들은 사람들이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와?’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더이상 어떻게 끌고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하고 조금 더 끌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실패한 시점에서 뭘 더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동아리에서 남자친구를 만났었고 제일 아끼는 선배를 만났고 제일 친한 동기를 만났다. 대학시절 가장 소중한 추억들도 동아리를 활동했을 시기에 생겼다. 그런만큼 마음을 담아 사랑했던 동아리였다.



나는 스스로 그 동아리를 등졌다. 또다시 돌아갈 곳 하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동아리의 쌍년이자 악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나는 우리 매장에 취직을 했다.



특히나 나를 아끼셨던 동료 분이 떠오른다. 정옥님이었다. 가래섞인 기침 소리를 종종 내곤 하시던 그분은, 맨날 털털하게 웃으며 나를 툭툭 쳤다. “너는 좀 다른 것 같아.”

나는 분명 별로 한 게 없는데도 항상 그런 말을 해줬다. “요즘 애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그런대. 그런데 너는 좀 다른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장난스럽게 응수하곤 했다.

“아니에요. 정옥님이 좋게 봐주신 거예요. 저 성격 되게 나빠요.”

나 성격 나쁜데. 난 동아리의 쌍년인데.



그분은 남들과는 좀 달랐다. 식당 홀에 나가지 않고, 항상 부엌 쪽의 김치 파트에만 상주하시는 분이었다. 같은 정직원이었음에도 그분의 포지션은 바뀌지 않고 매일매일 똑같았다. ‘김치’

김치 포지션은 제일 힘들다. 홀에 있던 김치랑 깍두기 통이 들어오면 그걸 일일이 살피고, 안쪽에 있던 김치를 꺼내어 다시 양념을 하고 새로운 김치를 통에 담는 역할이다. 항상 그 통로를 지나갈때면 김치를 담그고 있는 정옥님의 어깨를 주물러드렸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래오래 일해야한다, 첨지야. 나처럼 오래 일해서 점장까지 해버려.”



정옥님은 무려 12년차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달고 계셨다. 그런만큼 연세도 꽤 있으셨는데, 정년을 코앞에 둔 나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볼때마다 ‘손녀딸’이라고 부르곤 하셨다.

내가 퇴사한다는 걸 알았을때 가장 애석해하셨던 것도 그분이었다.

“첨지같은 애를 어디서 또 구해.. 내가 주임님한테 첨지같은 애 또 데리고 오라고 그랬어.”

내가 퇴사를 앞둔 시점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김치’ 포지션은 뒤쪽 포장하는 코너랑도 매우 붙어있었다. 정옥님은 항상 내가 혼자 포장을 하고 있을 때면 김치 통로에서 은근슬쩍 나오셔서 나를 도와주곤 하셨다. 20인분 포장이 들어온날도 그랬다.

’도와주겠다‘라고 하시더니 커다란 봉지와 김치더미를 꺼내시면서, 결국 혼자 그걸 다 하셨다.

그런 기억이 많았다. 정말 소소한데, 떠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일이 참 많았다.



그때는 내가 퇴사를 한 3주 정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내가 주임님께 장난 반으로 말했다.

“주임님. 저 송별회 해주실 거죠?”

주임님은 고민도 안하고 바로 대답해주셨다.

“당연하지.”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장난일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매장에는 송별회 따위는 없었다. 그걸 고민도 안하고 해주겠다고 답한 시점에서, 이미 진심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송별회는 정말로 열렸다. 술을 좋아하시던 직원분들이 일곱명 정도 도란도란 모여있는 걸 보며 나는 꽤 놀랐다. 직원분들은 우리 엄마뻘의 나이를 가지고 계셨다. 모두가 가정이 있었다.

퇴근을 하면 이미 10시가 넘는 시간에 술을 마시러 모일 만큼 기력이 굉장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내 송별회라는 이름을 단 회식자리에 참여해주었다.

그 중에는 정옥님도 계셨다.



정옥님은 술을 못 마신다고 하셨다. 커다란 500cc 생맥주와 초록병들이 드문드문 놓인 테이블에서 혼자 사이다 하나를 쥐고 앉은 그녀는 술이 오른 다른 사람들의 텐션 못지 않게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셨다. 술이 몇잔 오고간 뒤에 정옥님이 그런 말을 꺼내셨다.

“첨지가 말이야.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난 다음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보리차 찌꺼기를 같이 버리는 거 있지?”

아.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우리 매장에서는 겨울에 손님들에게 보리차를 제공한다. 매일같이 거대한 보리차 통에 티백 3통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우려낸다. 그 티백은 보리차가 다 우려질 때까지 물 속에 들어있다가 마감 시간 직전에 꺼내올려진다. 물이 빠지길 기다리면서 통 뚜껑 위에 올려져있는데, 내가 마감시간에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가다가 그걸 발견했다.

저녁 시간에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면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내 손에 들린, 빈공간이 많이 남은 쓰레기 봉투와 티백을 번갈아보다가

티백을 쓰레기 봉투에 털어넣고는 쓰레기장에 버렸다. 그냥, 생각없이 한 행동이었다. 쓰레기 봉투에 공간이 많이 남았는데 눈앞에 쓰레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정옥님의 한마디에 옆에 있던 선임님까지 맞장구를 치셨다.

“나도 그걸 봤어. 얘가 쓰레기봉투 들고 티백 앞에 서더니, 그걸 부어넣는거야. 그다음부터는 항상 그러더라? 그거 알면서도 안하는 사람 많거든. 그거 뿐이게?” 그러더니 선임님께서는 굉장히 많은 일화를 꺼내셨다. 내가 그랬던가? 내가 그랬었지. 그런 일도 있었구나. 그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첨지 보면서 내가 생각했잖아. 그래 첨지야, 니가 진짜 어른이다. 여기있는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워. 완전 애늙은이야.”



송별회는 그런 식으로 끝났다. 내 송별회라는 명목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다양한 주제가 나왔고 다같이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마지막에 나는 정옥님의 택시를 잡아주었다. 내 카카오택시에는 자동결제가 등록되어있었기 때문에, 정옥님의 택시비는 저절로 내 카드로 결제가 되었다. 나는 기억도 못하고 있었던 일을 다시 꺼낸 것은 이틀 후에 출근한 정옥님이셨다.

”아니 택시비를 왜 너가 결제해?“

“그게 앱에 제 카드가 등록되어 있거든요. 그냥 결제가 되는거예요.”

“그래도.. 직접 결제로 바꾸면 되잖아.”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웃었다.

“이럴때 효도하는 거죠.”

정옥님의 눈이 커지더니, 그녀는 또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김치 냉장고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택시비 고맙다고 내가 사왔어. 이따 먹어.”

이번에는 내 눈이 휘둥그레 커질 차례였다. 정말 바라는 것 없이 베푼 호의에, 예상하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그런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찡해졌다.



“회식때 정옥님 오셨다며?”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근데 정옥님이...”

“아. 먼저 가셨구나? 그럴 줄 알았어. 정옥님 원래 그런 자리 안좋아하시거든.”

정옥님이 술도 한잔 안드시고 남들 텐션에 맞춰서 신나게 얘기하시더라고요. 대단하셨어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어진 직원의 말에 나는 좀 어안벙벙하게 서있을수밖에 없었다. 아닌데? 정옥님은 끝까지 같이 있다가, 택시타고 가셨는데.



그 순간 나는 깨달아버렸다. 사실은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는 정옥님이, 나의 송별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이다와 함께 새벽 3시까지 자리를 지켜주신거구나. 그걸 알자마자 또 주책없이 눈물이 조금 고일 뻔했다. 원래 당사자의 뒤에서 듣는 진심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리는 법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 나도 느꼈다. 송별회를 열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칭찬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만큼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게 나한테는 숨쉬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원래 남들보다 조금 더 사람을 좋아했고, 상대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보고있었던만큼 그들도 착실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애정은 쌍방이 될 수 있는 거였다.



“첨지는 인생 2회차같아. 애가 어떻게 이렇게 성숙해? 봐봐. 저런 나물도 좋아하잖아. 원래 애들은 저런 반찬 안좋아하는데.“

“어휴. 쟤가 어딜봐서 애예요? 정신연령은 우리랑 동갑이에요.”

그런 과한 칭찬을 받을때마다 몸둘바를 모르고 쑥스러워했다. 마치 내 것이 아닌 옷을 걸친 것마냥 불편했다. 난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 성격 되게 나쁜데.

그랬던 것이, 그들의 애정을 깨닫고 나니까 다르게 보였다. 그 칭찬은 과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만큼 그들이 나를 세세하게 보고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나를 애정하니까, 아끼니까 그런것들을 알아봤을 뿐이었다.



그걸 알고 나자 드디어 눈에 보였다.

10시간동안의 육체노동은 같은 일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조금 무료했다. 상념은 쉽게 찾아왔고 나는 그럴때마다 막학기의 일을 끊임없이 돌아보았다.

왜 그런 일이 생겼지? 나는 왜 쌍년이 됐지?

나는 23년도에 하던대로 했는데. 왜 24년도는 그렇게나 망해버린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그 질문의 답을 찾아냈다. 애정은 쌍방이다. 나는 그시절 그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충고를 하기 전에 그의 사정을 조금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술이라도 도란도란 기울이면서 그의 사정을 들어봤으면 어땠을까.

내가, 애정없이 그들을 대했구나.

그게 가장 큰 차이였다. 23년도 총연출 첨지와 24년도 총연출 첨지의 큰 차이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정 하나의 부재는 커다란 차이를 불러일으켰다.



그게 내가 저지른 단 하나의 잘못이었다. 나는 항상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했고 다정하게 대했으며 부드러운 말투를 고수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도 애정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상대도 나에게 애정이 없었고 나는 손쉽게 쌍년이 되어버린 거였다.



<부끄럽지만 도망치는 건 도움이 된다>라는 제목의 일본 드라마가 있다. 꽤 옛날 드라마여서, 벌써 그 내용은 다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드라마 제목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때 도망쳤다. 온갖 욕을 후드려 먹으면서 동아리를 책임감없이 등지고, 도망쳐들어온 우리 매장에서 나는 많은 걸 찾았다.



내 과거 행동의 정답을 찾았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되찾았다. ‘쌍년’, ‘인격모독’, ‘남친 뒤에 숨는 비겁자’ 등등 온갖 말로 점철되어 있던 나는 그때 스스로도 나를 잘 판단하지 못했다.

그런가? 나는 쌍년이 맞나?

남들을 의심하는 걸로도 모자라 나까지도 의심했다. 그러나 도망쳐 들어온 우리 매장에서, 넘치는 애정을 받으면서 나는 차츰 다시 깨달았다.

아 맞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정말로 가끔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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