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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슐도 나도 끼었다

Verklemmt

by 수지

띵똥-

커피머신이 배달되는 소리였다.

그저께, 아마존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커피머신이 할인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결제를 했고, 오늘 배달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스를 열고, 커피 머신을 조립했다.

옷장 옆, 미리 비워둔 자리에 커피머신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부터는, 갓 내린 커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이제 내 독일 생활도, 뭔가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커피와 함께 먹을 아침 식사 메뉴를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커피머신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먼저 머신을 켜 예열을 시작했다.

구매 보상으로 들어있던 캡슐 다섯 개. 그중 아로마향이 강하다는 걸 골랐다.

레버를 당겨 머신을 열고, 캡슐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레버를 내려 닫으려는데,

... 레버가 중간쯤에서 멈췄다.

살짝 더 힘을 줘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캡슐이 끼인 것 같았다.

젓가락으로 빼보려고도 하고, 머신을 살짝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캡슐은 찌그러진 채 단단히 끼어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봤다.

머신을 꺼두면, 열기가 식으며 자연스럽게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결국 아침 커피는 포기하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식은 캡슐이 톡 빠질 거야. 그럼 오후에라도 커피를 마실 수 있겠지.'



5시간 뒤, 집에 돌아와 다시 커피머신을 앞에 섰다.

여전히 애매하게 들려 있는 레버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심호흡을 하고, 부드럽게 레버를 들어 올려 보았다.

....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세게 레버를 당겨볼까 했지만, 괜히 새 머신을 망가뜨릴까 봐 겁이 났다.

차라리 고객센터를 찾아가 수리를 맡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일단 커피머신 독일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설정을 영어로 바꾸고, 서비스 섹션을 클릭했다.

고객들이 겪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정리해 둔 FAQ 페이지였는데....

문제는, 이 부분만 유독 영어로 번역이 안 돼 있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화면을 한참 노려보다가, 눈에 들어온 단어 하나.

'verklemmt'.

유학생활 11년 차, 모르긴 몰라도 뭔가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이 드는 단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verklemmt는 '끼어서 움직이지 않는'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캡슐이 걸려버린 상황을 말하는 거였다.

희망을 품고, 해당 문단을 복사해 AI 번역기에 붙여 넣었다.

결과는...

'수리 센터에 문의해 주세요'.

그리고, 가장 가까운 수리센터는.... 기차로 50분 거리였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이 놈의 나라에 온 뒤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고작 아침을 신선한 커피로 시작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왜 이 나라는, 이런 소소한 행복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 걸까.

화가 났다. 머리에 열이 나는 것 같아,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쩌면... 석사를 또 한 번 하겠다고 이 나라에 온 것부터가 잘못된 걸지도 몰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도착한 건, 내 신세에 대한 한탄.

이론물리학 박사 진학에 실패하고, 독일에서 두 번째 석사를 전전하는 나.

그리고, 닫히지도, 열리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캡슐이 걸려있는 커피머신.

어쩐지 둘이 겹쳐 보였다.


이때 아빠한테 메시지가 왔다.

전날 밤, 새 커피머신을 샀다고 자랑한 것에 대한 답장이었다.

"새 커피머신으로 내린 커피는 어때?"

나는 전화를 걸어 내 상황을 설명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가 "잠깐만 기다려봐"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영상 링크와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힘으로 열면 된대. 절대 안 망가진대. 레버 힘껏 당겨봐.'


다시 커피머신 앞에 섰다.

‘만에 하나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잠시 머뭇거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캡슐 걸려있으면, 못쓰기는 마찬가지잖아.’

결국 용기를 냈다. 한국에서 기른 팔근육을 사용할 타이밍이었다.


떨그럭.

찌그러진 캡슐이 플라스틱 통에 떨어지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됐다….’

찌그러진 캡슐을 치우고, 새 커피 캡슐을 넣어 커피를 내렸다.

커피 머신이 도착한 지 24시간 만에 마시는 첫 커피였다.

아빠한테도 인증샷을 보냈다.


결국, 해결책은 일단 부딪혀보는 거였다.
‘내가 손댔다가 더 망가질까 봐’,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적어도, 자취 생활엔 그런 기대가 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학업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스펙이 부족한 것 같아서’, '나중에 더 적합한 기회가 올 것 같아서' 계속해서 도전을 미뤄왔던 건 아닐까.

어쩌면, verklemmt 되었을 땐, 일단 한번 부딪혀보는 게 돌파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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